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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 문화재명소태리 오층석탑(小台里五層石塔)
  • 분류국가지정문화재
  • 지정번호제312호
  • 수량(면적)4.63m
  • 소유자국유
  • 관리자밀양시
  • 소재지밀양시 청도면 소태길 36-52

소개

이 탑은 전형적인 방형의 신라탑과는 달리 단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기단(基亶) 구성의 형식이 독특하고 탑신(塔身)에서도 특색이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단은 1단이면서도 4장의 장대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에는 안상(眼象)을 2구씩 새겼다. 윗면 중앙에는 별도의 돌을 얹어 탑신 괴임을 3단으로 조성하였으며 그 윗면은 낙수면(落水面)처럼 경사져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을 제외하고는 몸돌·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1층 몸돌은 각 모서리에 두툼한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높이가 매우 높다. 이에 비해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도 크게 줄고 기둥 조각도 훨씬 좁아졌다. 지붕돌은 처마 끝이 위로 들린 정도가 경쾌하고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네 귀퉁이에는 독특하게도 작은 연꽃무늬 조각이 있으며 그 가운데 방울장식을 달았던 듯한 큼직한 구멍이 있다. 탑의 머리에는 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과 철로 만든 기둥의 한 끝만이 남아 있다.

탑신부의 첫째층 옥신(屋身)은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반면 다른 옥신과 옥개석은 한 돌로 구성되어 있다. 옥신은 층 옥신만 유난히 높을 뿐 2층 이상은 비교적 체감율이 적은 편이다. 옥신석에는 모퉁이 기둥(隅柱)만 새겼을(模刻)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아래에 각 층 모두 3단씩의 받침을 두고 있으며, 낙수면은 비교적 경사가 급한데 전각(轉角)에서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옥개의 합각부(合角部)에는 풍경(風磬)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뚫려져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연판문(蓮辨文)이 새겨 놓았다.

1919년 3월에 상륜부에서 가로 60cm 세로 40cm의 백지에 반초서로 묵서한 “당탑조성기(堂塔造成記)”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고려 예종 4년(1109)이라고 작성된 당탑조성기(堂塔造成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乾統玖年 三月九日記 至今二百六新龍二年良中律業皇龍寺沙門惠照亦住持爲乎矣亦中同寺依紙中大師學先亦至今八壬午年入寺火香爲只丁亥年元發心爲只金堂一間佛坐卽造石塔五言幷新造鍮銅弁六十二斤金堂塔各帑香爐香盒幷柒捌斤五兩鐵物一千百斤三寶內鍮鏡一入十一斤弁以施行綠由住持主法顯儀中大師學先玆上幸沖次幸先次應連次元選等亦造成日施行同寺傳住持尙資法護中大師住持甘年“이라고 이두문자(吏讀文字:傍點)를 혼용하여 기록했다.
조성기를 작성한 건통(乾統) 9년의 건통은 요(遼)나라 천조제(天祚帝)의 연호로 고려 예종 4년(1109)에 해당된다. 당탑조성기(堂塔造成記)에는 신라 효공왕 8년 (新龍 2)에 황룡사의 사문 혜조가 이 절의 주지로 있었다는 것과 또 황룡사에 있던 중대사 학선이 8년 전에 이 절의 주지로 와서 예종 2년(丁亥 1107) 정월에 발심하여 금당 1칸과 불좌를 만들고 5층 석탑을 세웠다는 사실을 적고 있으며, 구리와 놋쇠를 도합 62근을 사용하였다고 했다. 이밖에 향합 등 절에 들인 물목과 재료의 사용량을 적고 불사에 참여한 주지 이하 스님들의 법계와 법명도 적어 놓았다 이 탑이 속했던 사찰은 확실하지 않으며 다만 구전으로 천주사(天柱寺), 천죽사(天竹寺) 또는 죽암사(竹岩寺) 등으로 전해오고 있으나 분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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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자 : 문화예술과 문화재담당 전화 : 055-359-5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