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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현황

가구수/인구수

(단위:명)
세대수, 인구수현황, 면적 등 하남읍 세대수/인구수 현황
가 구 수 인 구 현 황 면적
3,786 7,209 3,594 3,615 36.88 ㎢

지역특성

하남읍은 밀양시의 서남부에 위치하며 시의 남단 관문으로 교통요충지이며 북쪽으로는 옛 수산현의 진산인 덕대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산의 한줄기가 동쪽으로 뻗어내려와 남전리에 이르며, 이능선을 경계로 상남면과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구박천을 사이에 두고 상남면과 경계를, 서쪽으로는 초동면 검암리와 인접해 있으며, 남쪽에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창원시, 김해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행정구역

33리 93반 ( 자연마을 44개 )

조직 및 업무(담당별 업무분장)

담당별 분장사무 등 조직 및 업무
구분 담당업무
총무담당 총무, 기획, 동향, 회계, 환경, 보건
맞춤형복지담당 사회복지, 노인복지, 장애인복지
민원재무담당 가족관계등록, 인감, 주민등록, 제증명, 민방위, 지방세 전반
산업경제담당 농정, 산림, 기업경제, 교통행정, 직불제
건설담당 토목일반, 재해

마을약사(전설)

하남읍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대서방진출의 전략 기지였으며, 후에는 穿山部曲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수산현이 되어 密城郡의 속현이 되었다. 일명 은산이라고 했다. 그것은 낙동강의 은빛 모래사장이 아름답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헌종5년)때 면리제가 실시됨에 따라 부남면이 되었다가 1769년(영조 45년)에 본군방리 개편에 따라 부남면이 상남면과 하남면으로 나뉘어졌으며, 1973년 7월 1일자로 읍으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유물, 유적

우리읍 지역은 대체로 지석묘가 많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하남읍 수산리 동촌마을 지석묘

하남읍 수산리 570번지 일대에 지석묘와 조개더미(패총)가 함께 있는데 오랜 옛날부터 주거지로 형성되어온 것같다. 주민들은 지석묘가 본래 4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3기만 남아있다. 이부근의 논에서 수년전에 전신주 매설공사를 할 때 석관묘로 보이는 유구를 발견했다고 하며 상당량의 유물도 있었다고 했는데 현재로서는 유물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고 위치는 동촌마을 뒷편 우물이 있는 논으로 확실히 확인된다.

하남읍 양동리의 지석묘

이 지석묘는 양동마을 입구에서 대사리 서당골로 넘어가는 왼쪽편 길목에 위치 하고 있다. 현재 2기가 있는데 이마을 사람들은 앞쪽 지석묘의 개선이 소머리 처럼 생겼다고(실제로는 거북처럼 생겼음) 해서 소바위 라고 부르며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따와 소바우라고 부른다.

하남읍 파서리의 지석묘

남전 진입로 길가에서 6미터 떨어진 논에 2기의 지석묘가 있었는데, 원래 개석은 장방형이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길에서 보면 윗면과 좌측이 인위적으로 심하게 부서져 본래의 모양을 측정하기 곤란하고 지석도 논에 묻혀있어 실측이 불가능하다.

하남읍 남전리의 지석묘

하남읍 남전리에는 약 30여기의 지석묘가 군집해 있었서 우리고장에서 대표적 선사문화 유적지 중의 하나로 볼수 있다 이곳의 표고는 약 70미터 정도로 비교적 높으며 뒤로는 해발 620미터의 덕대산이 있고 앞으로도 산으로 둘러져 있다. 남전리에 분포해있는 지석묘는 보담마을의 지석묘, 남전리 본동마을앞의 지석묘, 남전리 효자문의 지석묘등 지석묘가 넓게 산재해있다. 보담마을의 지석묘는 마을앞 차도에 접해있는 묘군과 마을동쪽 저수지 위의 전답에서 마을내의 가옥 안에까지 수기의 지석묘가 거의 직선으로 연결되어 군을 이루고 있는데, 먼저 보담 마을앞 차도에 있는 6기의 지석묘를 보면 타원형으로 배열되어있고 이마을 주민들은 이를 두고 칠성바위라고들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남전리 본동마을앞의 지석묘는 마을앞에 모두 14기의 지석묘가 군을 이루고 있다
남전리 효자문의 지석묘는 효자 "이신"의 정려가 있는 효자문 마을 오른편 끝에 2기의 지석묘가 있다. 윗쪽에 있는 개석은 장방형으로 생겼으며 15개 정도의 성혈이 보이고, 지석은 묻혀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랫쪽 개석은 부정형으로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것 같다. 지석이 여러개 보이고 산수유 나무 한그루가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산제

고대 삼한 시대로부터 농사에 관계용수시설을 이용할줄 알았던 곳중에는 전북 김제의 벽골제와 충북제천의 의림지가 있고 이곳수산에도 수산제라는 것이 있었서 앞의 두곳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제로 불리우고 이곳들은 삼한시대의 중요한 농경문화유적으로 평가 받고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수산제는 현재의 밀양군 하남읍의 수산리,귀명리,양동리와 초동면의 검암리, 금포리에 걸쳐 있었다. 지금까지 수산제에 대해 기록상으로는 전해 내려왔으나 정확한 위치를 몰라 향토사학자를 비롯한 많은 분들의 애를 태워 오다가 하남읍 수산리에 거주하는 향토사학자 손정태씨의 끈질긴 조사 활동 끝에 1987년 11월 24일 오후 2시경에 수산제 수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상에 드러난 수문은 폭151-110센티, 높이 181센티, 길이가 약20미터이며 한덩어리의 자연암반을 정으로 쪼아만든 것이고 입구에 수문목을 끼워 넣을 수 있는 홈을 2겹으로 파높았음이 확인 되었다. 파괴된 수문목조각 2점과 제일 아래부분에 끼워진 불에 구워 섞지 않도록 처리된 완전한 형태의 수문목 1점이 수습되었다.

민속놀이, 전설, 민요 등

민속놀이

당산고사

우리고장은 옛부터 농경지가 넓은 천혜의 농사고장으로서 농경문화의 뿌리가 깊은곳이다. 이런곳에서는 생명적인 과제로서 제천의식 이였던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마한의 주제천신과 일치하는 당산고사를 지내왔다. 매년 풍년이 들어 제때에 가을마당이 순조롭게 끝나고 나면 마을에서 얼마씩 추렴을 해서 추수감사의 행사로 당산제를 지내고 풍년잔치를 벌려 왔는데 특히 가을에 햇곡식과 햇과일로 감사고사를 지내는 것은 "가을굿" 이라 하였다.

연날리기

정초부터 시작하여 대보름날 액을 띄워 보낸다는 뜻으로 멀리뛰어 보내는 남자들의 민속놀이이다. 연사는 무명실이나 명주실 또는 당사로 하는데 그연줄에다가 사기를 보드랍게 갈고 헝겁에 걸러서 구레풀에 섞어 멕인다. 연을 높이 띄운다음 남의 연줄위에서 내리눌러 끊어버리는 것이 연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꼰뚜기

꼰은 표준말로 "고누"인데 주로 여름 나무그늘 밑에서 남자 아이들이 많이 하는 놀이이다. 노는 방법은 "참꼰""대장꼰" "동서남북꼰" "새미꼰""호박꼰등 여러가지가 있다.

활쏘기

활쏘기는 궁술 또는 궁도라고 하는데 그기능을 익히자면 우선 장비의 준비에 만도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며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한층이 즐기던 운동이요 오락 이었다.

돈치기

"망깨"라고도 하는데 척전이라 표기하였다. 주로 음력 정초나 추석등 명절에 청소년들이 세배돈이나 용돈으로 받은 엽전이나 동전 따위를 따먹기 시합으로 하는 놀이이다.

튀전

요즈음은 주로 화투를 사용하고 옛 튀전목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일자에서 장자까지를 표시하는 기호가 기묘한데 창호지를 서너번 겹으로 발라서 빳빳하게 만든다음 길이 18센치, 너비 1.5센치 정도로 오려서 그림을 만든다. 일에서 구까지는 같은 것으로 4개씩 장자는 그림이 다른 것으로 4개, 합해서 40개가 된다.

민 요

모찌는노래(1)

새야새야 청초새야 니어데자고 이제오노
낙동강칠백리 수풀속에 숲속에서 자고오네
일월햇님이 돋아와도 이슬털줄 모르더라
매하야가지를 꺽어쥐고 이슬털로 가자시라
한강수에다 모를부어 모쪄내기가 난감한네
하늘에다 목화를 심어 목화따기가 난감하다

모찌는 노래(2)

다풀다풀 다박머리 해다전데 어디로가노/ 우리야 부모님 산소등에 젖먹으로 나는가요/ 낭창낭창 베루 끝에 무정하다 저오랍아/ 우리도 죽어서 후승가서 낭군버텅 섬기보세/ 남천수물이 펄펄넘어 배두채가 떠돌오네/ 앞의 배는 임의배요 뒤에 배는 자기배라/ 바디짱겉은 모구자리 장구판만치 남았구나/ 장기야판이사 좋다마는 장기둘히 정히없네/ 아첨이슬 채전밭에 부릿대꺽는 저큰아가/ 일을랑 ?어서 광주리다 담고 줄기한쌍 나름줌세/ 알굴삼삼 곱은독에 권주한상 나를줌세/ 남창문북창문 다열어놓고 구월이담상 꽃밭일세/ 꽃밭속에는 나비가놀고 나비속에는 신선이 논다/ 한제야한섬 모를 부여 잡나락이 반치로세/ 동넘에다 첩을두어 잡사람이 반치로세/ 이논배미마다 모를심어 금실금실 영화로다/ 우리야 부모님 산소등에 솔을심어 영화로다/ 모야모야 노랑모야 너언제커서 환상할래/ 이달크고 훗달크고 새달초승에 환상하지/ 비묻었네 비묻었네 양산땅에 비묻었네/ 그비가 비아니라 억만군사 눈물이라.

보리타작노래

옹해야 옹해야 종도루깨 옹해야 이내말씀 옹해야/ 들어보소 옹해야 없는신명 옹해야 있는 듯이 옹해야/ 어깨춤을 옹해야 우쭐우쭐 옹해야 신명나게 옹해야/ 소리하니 옹해야 먼데사람 옹해야 구경하고 옹해야/ 젙에사람 옹해야 춤을추네 옹해야 여보시오 옹해야/ 종도루깨 옹해야 오뉴월염천 옹해야 두덕더위 옹해야/ 더운것도 옹해야 무릅쓰고 옹해야 이와같이 옹해야/ 잘도하네 옹해야 목도루깨 옹해야 신명나네 옹해야/ 이럭저럭 옹해야 다나왔네 옹해야 물러서자 옹해야/ 너무가네 옹해야 어제봐도 옹해야 갓본 듯이 옹해야/ 달라들면 옹해야 때려주자 옹해야 얼씨구나 옹해야/ 잘도하네 옹해야 여보시오 옹해야 종도루께 옹해야/ 배고프면 옹해야 밥을주마 옹해야 목마르면 옹해야/ 술을주네 옹해야 여보시오 옹해야 농부들아 옹해야/ 이내말씀 옹해야 들어보소 옹해야 넘날적에 옹해야/ 나도나고 옹해야 내날적에 옹해야 넘도났건만 옹해야/ 어떤사람 옹해야 팔자좋아 옹해야 고대광실 옹해야/ 높은집에 옹해야 사모에다 옹해야 핑경달아 옹해야/ 동남풍이 옹해야 더리불어 옹해야 핑경소리 옹해야/ 절로나네 옹해야 우리겉은 옹해야 농부들은 옹해야/ 전생에무슨죄로 옹해야 오뉴월무덕더위 옹해야 더운것도무릅쓰고 옹해야/ 주기살기 옹해야 달려더니 옹해야 어디더노말도없네 옹해야/ 아-이후후 옹해야 어차 어차 어차 어차/ 두줄넘어가네 애화 애어야 애어야 애화 넘어간다 애화/ 얼시고 애화 잘도한다 애화 한바지야 애화/ 때리라 애화 끝바지야 에화 때리라 에화/ 요놈의보리가 에화 양반에보린가 에화 수염이도길구나 에화/ 때리라 에화 없는가여기지 말고 에화 수염이도길구나 에화/ 때리라 에화 없는가여기지 말고 에화 전신만신날보리다 에화/ 보리풍년졌구나 에화 삼천리강산에 에화 우리에이강토 에화/ 보리가근본이다 에화 때리라 에화 두팔대힘을주어 에화/ 다리들고때려주소 에화 여내연방 에화 넘어간다 에화/ 애이야 에화 때리라 에화 잘도하네 에화/ 애이야 에화 때리라 에화 잘도네 에화/ 아하 에화

그네노래

소천방 심오진남기 높고낮은 가지다가
오색가지 근대로매와 임이 타면은 내가밀고
내가타면은 임이밀고 저임아줄떨어지면 정떨어지느니

전 설

떠내려오다 선 백산

하남읍 백산리에 큰돌이 있는데 그복판에 산하나가 솟아 있었다. 어느날 어떤 여자가 오줌을 누다가 보니까 산이 하나 둥둥 떠내려오는 것이었다 "아이구, 저산이 떠내려온다". 여자는 깜짝놀라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바람에 떠내려오던 산은 들 한복판에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그이후 그산은 여러 가지 이적을 나타내 보이면서 명산으로서 이름이 자자하였다
달걀을 저녁에 산에다 묻어 놓으면 다음날 새벽에 병아리가 깨어나 우는것이였다. 또한 술을 빚어 산에다 갖다 놓으면 다음날 아침에 익어서 마실수가 있었다. 정말 희한한 산이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산에다 묘를 쓸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산에다 묘를 쓰면 동네의 소나 닭 같은 가축은 물론이 거니와 사람들도 까닭모르게 죽기 때문이였다. 그산에는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몰려와서 살기 시작하였는데 백가지 성씨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해서 백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죽어서 구렁이가 된 노파

옛날수산에 한노파가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노파가 어찌나 지독한지 남에게 밥 한술 안주고 며느리에게도 모질게 구는데, 나이가 들자 그 자식들이 살림을 도 맡아 하면서부터 인심을 비로서 회복하게 되었다 어느날 노파가 병이나서 얼마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 처음에는 집안식구들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큰며느리가 상식을 올리려고 방에 들었갔다가 커다란 구렁이를 보고 그만 기절해 버렸다. 큰아들이 이를 발견하고 그구렁이는 분명히 자기 어머니가 아주독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변신한것이라 생가했다. 구렁이를 집밖으로 쫓아려했으나 무슨수를 다써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계속 집안에 남아서 집곳곳을 돌아 다녔고 또 논을 메어주려오는 일꾼까지도 겁을 주어 그집에 접근도 못하게 만들었다. 큰아들은 궁리 끝에 노자돈을 두둑히 챙기고 망태로 멜방을 하여 구렁이를 달래었다 "어머니 모든일을 잊어버리고 저와 함께 팔도구경이나 갑시다" 그러자 구렁이가 멜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그래서 구렁이와 큰아들은 같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구경을 하는데 어느날 큰아들이 돌아 다니다가 지쳐서 한주막에서 쉬게 되었다. 구렁이에게 음식도 주고 말도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주막 어미가 하도 신기해서 그내막을 묻자 아들은 주저하다가 이야기를 해주었다.이야기를 들은 주막어미는 아들의 효성이 지극함을 알고 그에게 한가지 묘책을 일러 주었다. 닭고기를 큰아들에게 주고는 구렁이와 함께 산꼭대기에 오르면 큰호랑이가 있을테니 닭고기와 함께 구렁이를 호랑이에게 두고 내려오는 것이였다. 큰아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산에 오라가니 정말 큰호랑이가 꼭대기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주막어미가 시키는데로 닭고기와 구렁이를 호랑이 앞에 두고는 호랑이에게 큰절을 하고 되돌아 내려왔다. 내려오니 주막어미가 반가히 맞으면서 "당신은 참으로 대단한 효자 이십니다". 거기 올라간 사람중에 지금까지 내려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하면서 감탄하였다. 그 이후 다시는 구렁이가 나타나지 않았고 그 집의 후손들은 내내 잘 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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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자 : 하남읍 전화 : 055-359-6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