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수 | 인 구 현 황 | 면 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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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남 | 여 | ||
2,809 | 4,897 | 2,390 | 2,507 | 100.35㎢ |
28리 77반 68개 자연마을
부서명 | 분 장 사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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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무 담 당 | 총무, 기획, 동향, 선거, 문화관광, 체육, 통계, 회계, 지방세전반, 국공유재산, 토목일반, 재해, 환경, 광고물 |
맞춤형복지담당 | 복지사각지대 일제조사 및 발굴, 통합사례관리, 사례회의, 민관협력 및 인적안전망 운영, 복지자원 조사발굴 및 연계지원, 사회복지전반, 보건, 마을회관관리 등 |
민 원 재 무 담 당 | 가족관계등록, 인감, 주민등록, 제증명, 민방위 |
산 업 경 제 담 당 | 농정, 산림, 지역경제, 교통행정, 작물재해 |
경남 유형문화재 제 15호 이고 임진왜란때 승려로써 국난을 극복한 사명당 송운대사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영조 18년(1742년)에 대사의 5대 법손인 남붕이 건립한 것임. 사명대사는 속성은 임씨 자는 이환 호는 송운이다. 비석은 총높이 390㎝(12자9치), 폭 97㎝(3자8치) 두께 55㎝(1자9치) 비석높이 276㎝(9자1치)임.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비석에서 땀을 흘림
내진리 소재 (내진리 유물, 유적 참조)
정곡리 소재 (정곡리 유물,유적 참조)
연상리 소재 (연상리 유물, 유적 참조)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에서 전승되고 있는 대중적인 민속놀이이다. 무안용호놀이의 기원과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마을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조선시대부터 음력 정월 보름날을 전후하여 3∼4일간 마을의 큰 행사로서 전래한 것인데, 일제 강점기에는 일시 중단되었다가 1960년대부터 이 마을 정성용의 주창으로 부활되었다. 용호놀이는 어느 고을에서나 있어온 줄싸움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곳 무안은 조선시대에 '수안'이라는 역리로서 창녕, 청도, 창원등지와 접경한 교통, 산업의 중심지로서 마을 앞으로는 내진천이 흐르고 후면에는 좌청룡의 지세를 이룬 '진동산'과 우백호의 형국을 한 '질부산'이 배경을 이루가 있다.
무안리는 동서로 양분되어 진동산 쪽의 동부는 '용촌'이 되었고 질부산 쪽의 서부는 '호촌'이 되어 옛날부터 줄 당기기의 전통이 있어왔다. 정월 명절이 되면 동,서촌에서는 서로 다투어 짚을 모아 큰 줄을 매는데 대개 평균 직경이 60cm, 길이가 150m나 되었으며, 동부의 줄을 웅용으로 서부의 것을 자호로 이름 붙였다. 장소는 내진천의 하류인 무안천 제방 안 논바닥으로 수천 명의 지방민들이 운집하여 줄을 당겨 끌어오는 힘으로써 승패를 가름하였는데, 이것이 어느 사이 줄머리에서 독전하는 깃발을 먼저 뺏는 것으로 승패의 방법이 변했다고 한다.
용호놀이는 이러한 큰 줄싸움이 있기 하루 전날에 전개되는 전희로서 각기 자기편의 위세를 과시하는 놀이로 볼 수 있다.이 놀이에서는 큰 줄을 만들기까지의 과정과 그 줄을 메고 위세를 과시하는 연희 단계에 특색이 있다. 큰 줄을 만들기 위하여 그 전단계로서 동네 골목마다 작은 골목줄을 드리고 그 골목줄을 합하여 다시 큰 줄을 매는데 그 과정에서 놀이를 꾸며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신밟기를 하여 술추렴으로 춤을 추고 즐긴다. 이것은 잡귀를 몰아내고 풍년을 빌어주는 대가로 얻은 재물을 모아 놀이의 비용을 장만하는 동시에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는 마을의 협동을 상징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큰 줄을 완성하여 둘러메고는 상대편 마을에 가서 놀리기도 하고 싸움을 걸다가 자기편 마을로 돌아와서는 촌민이 함께 어울려 흥겨운 춤으로 전의를 돋운다. 또 이 놀이에서 주목되는 것은 용호의 분장이라든가 오방신장을 비롯한 오광대놀이의 가면이라 할 것이며, 농악을 앞세우고 상대편 마을을 돌아다니는 놀림마당의 구성이 특징을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