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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하남읍

본래 신라의 천하부곡인데 고려초에 수산현으로고치고 현종때에 밀양부에 내속하여 부남면이 되었다가 뒤에 다시 상남면, 하남면으로 나뉘고 광복후에 하남읍이 되었다.
일명 은산이라고도 한다. 산이 낮고 들이 넓으며 낙동강이 남쪽으로 가로누운 곡창이다.
수산리, 남전리, 양동리, 귀명리, 파서리 , 명례리의 본래의 이름은 멱례 , 미례인데 일명 뇌진이라고도 하였다. 해양, 동암을 합하였으며, 행양원이 있었다.
멱례란 넓은들, 용진강(낙동강)위에 고산이있어 멱례라 이름지었다.

백산리

백산이란 넓은 들 가운데에 서있는 독산이란 뜻이다.
도선의 지리지에 이르기를 "수산현 동쪽 에바다에서 달이 뜨는 것과 같은 형상의 명당이 있다. " 하였는데 뒷 사람들은 이곳이라 하였다. 그 남쪽산록에 정자가 있어 백산정이라 하였으며 수산현3승의 1이었다 한다.

대사리

대사리는 본래 대사동리였는데 국농소(둔전)이었던 수산들을 하사 받았던 봉선사란 큰 절이 없어진 뒤에 "절동리" 란뜻으로 부르다가 사(寺)와 사(司)가 서로 음이 같으므로 대사리로 관용하게 되었다. 정남정이란 정자가 있어, 신라왕에게 가락의 구현왕이 항복한 곳이므로 정자 를 짓고 정남정이라 하였다 한다.

덕민정

내서동 람수정의 아래쪽에 있었던 수산현의 공해건물이었다. 권람의 덕민정 기문에 의하면 덕민정은 1448년 이백상이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수산현의 공해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50년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3간의 건물을 지어 현 청의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좌,우에 각각 3간씩 붙여 단청을 하였다. 또 건물의 관리상 필요한 부속 건물을 지어 본부에서 수산현으로 파견한 사람들을 소속시켰으며, 주변의 전답을 개간하게 하여 해마다 수백 석의 수확을 거두어 손님 접대 등 현의 경비로 충당케 하였다. 수산현은 지리적으로 밀양에서 50여리 지점에 있다.
현의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서 영남의 물산과 조운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현을 지나가는 사명이나 귀빈이 많았고, 본부에서 이들을 영접해야 했으나 현에는 공해가 없어 빈객들은 모두 본부의 객사로 안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많았다. 덕민정이라고 부른것은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기 위해서 세운 공해라고 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덕민정과 남수정이 다 소실되고 말았다. 임난후 그 곳에 람수정과 수산창만 중건하였다. 숙종 때 낙동강의 범람을 관측하여 수산창에 불을 질러 들판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을 구한 영장 김기의 공을 표창하여 덕민정, 람수정의 구허를 그에게 하사하였다.

람수정

내서동 낙동강 언덕가에 있다. 현재의 람수정은 광주 김씨 일문의 대종실이 되었다. 원래는 수산현에 소속된 누대로서 1538년에 부사 장적이 창건하였고, 1593년 어득강이 후임 부사로 도임하여 단청을 한 후 "람수" 2자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1542년에 부사 박세후가 10간의 부속건물로 지어 현사로 삼고, 주위에 담장과 대문을 설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다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뒤에 유허 한 쪽에 수산창을 건립하여 곡식을 보관하였다. 숙종때 영장 김기가 낙동강이 범람하는 것을 보고, 수산창에 불을 질러 많은 인명을 구한 공으로 이 일대를 하사받아 이 지방에 살던 광주 김씨 일문의 사패지가 되었다.

수산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산의 경계 내에 있다고 해서 수산제라고 한다. 현재는 하남읍과 초동면에 걸쳐서 위치하고 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미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를 하기 위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 문헌상으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 경상남도 지정문화재(지방기념물) 제102호로 전북 김제의 벽골제, 충북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농경문화유적으로 불리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관개수리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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