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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내일동(內一洞)

  • 1895년(고종 32년) 부내면의 동문내리, 서문내리, 남문내리로 호칭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서부, 남부, 동부, 로상, 로하, 교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내일리라 호칭하였다. 내일리 성내에 오부가 있는데, 동‧서‧남‧북‧중부가 오늘의 내일동이다.
  • 이후 3리로 줄어 동문내리, 남문내리, 서문내리로 되었는데 지금까지 속칭 동문 안, 남문 안, 서문 안이라 부르고 있음, 내일동은 부내면에서 첫째가는 동리라는 뜻과 가장 중심지역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호칭이다.

동문껄(현 내일1,5통 일원)

  • 속칭 동문거리 또는 동문안이라고도 한다. 밀양읍성의 동문이 있었던 곳으로 내일 1통, 5통일원이 여기에 해당된다.

뱃다리껄 (현 내일2통)

  • 현 말양교가 생기기 전에 삼문동에서 내일동, 즉 성내로 들어오려면 의천강(남천강)을 건너와야 하는데, 조선말 신작로가 생기면서 이곳에 뱃다리(부교)가 생기게 되어 모든 행인이 이 뱃다리를 이용해서 성내를 왕래하게 되었다. 이 뱃다리 부근의 마을이 곧 뱃다리껄이다. 뱃다리란 배를 여러 개 연결하여 만든 것으로 다른 이름으로 부교라는 이름도 있다.

향청껄 (현 내일2통)

  • 옛날에 향청이 있었던 거리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의 상설시장 남쪽 곡물 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서문껄 (현 내일 3통)

  • 속칭 서문거리 또는 서문안이라고도 한단. 내일동 서쪽에 있는 마을로 성의 서문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의 장로교회와 동흥빌딩부근 지역일원이다.

북성사거리 (현 내일4통)

  • 내일동사무소에서 서북쪽으로 50m 지점에 동서남북 십자로 네갈래의 길이 나오는데 이곳이 북성사거리로 옛날 밀양읍성의 북쪽이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신당말리 (현 내일5통)

  • 말리는 만댕이에서 온말이다. 즉 산의 정상부를 사투리로 산만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당말리는 곧 神堂(신당)을 모신 위쪽 높은 곳이라는 뜻이 되므로 신당 위쪽에 있는 마을임. 신당은 성황사, 즉 고려개국의 공신 孫競訓(손경훈) 장군을 모시던 곳이다.

용평동 (龍平洞)

  • 내일동사무소에서 동문거리를 넘어 동쪽으로 약 3Km떨어진 마을로 승벌(僧伐), 섬불 또는 용성(龍城), 용평(龍平)으로 변천되었다. 현재 용평 1, 2통으로 분통되어 있으며 자연부락으로는 용평1통인 평리, 새터, 용평2통인 섬벌, 사인당, 죽담(竹潭), 장선, 월연(月淵))을 합한 곳이다.

평리 (현 용평1통)

  • 원래 坪里 였는데 근대에 와서 '土'변이 없어지고 平里가 되었다. 평리는 들(野) 마을이란 뜻으로 이 지방에서 가장 유서 깊은 마을로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배출한 곳이다.

새터 (현 용평1통)

  • 아동산 동쪽 강변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로서 옛날에는 역촌이었다. 새집을 지어 형성하였다고 새터마을이라고 한다.

섬벌 (현 용평2통)

  • 마을앞에 의천강이 감돌고 龍頭山이 이마을을 城처럼 두르고 있어 마치 섬과같이 보인다고 하여 섬벌이라고 하였으며, '벌'은 原野를 뜻하는 것이다. 한문으로 僧伐이라 표기하여 후세에 崇儒抑佛政策으로 중을 몰아낸 것으로 설명하는 사람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

사인당 (舍人當)

  • 1489년(연산군 5년)에 驪州 李氏 入鄕祖인 李師弼이 연산군때 벼슬을 버리고 옮겨와 맨처음 자리를 잡고 살던 곳이다. 선대에 사인 벼슬을 한분이 있어 사인당으로 불리어지다가 뒤에 마을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뒤에 마을이 폐허가 되고 그 후 그의 자손들이 모여 마을을 이루어 살았는데 뒤에 섬벌이라 하였다.

장선(현 용평2통)

  • 원래는 長城이라고 하였다. 推火山城 밑에 있는 마을로서 城이 길게 되어 있어 長城이라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 변해서 城이 善으로 변했다고 한다.

죽담 (현 용평2통)

  • 사인당 동쪽에 있는 못이었는데 둘레가 약 380尺이 되고 깊이는 매우 깊었으며 못 속에 馬龍이 살고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월연 (月淵)

  • 월영사(月影寺)의 옛터인데 1519년(중종 14)에 월연 이태(李迨)선생께서 쌍경당 (雙鏡堂)을 짓고 살면서 호를 따서 월연동이라 하였다.

월연정(月淵亭)

  • 東川(동천), 北川(북천)의 合水(합수)로 月盈淵(월영연)이 되었는데 월영연 위의 월영사(月影寺) 옛터에 세워진 유서 깊은 정자이다. 조선 중종조에 한림(翰林) 이태(李迨)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이곳에 별업(別業)을 마련하고 그의 호를 월연(月淵)이라 하였다. 정당(正堂)의 이름이 쌍경당(雙鏡堂)이고 이 아래 편에 따라 재헌(齋軒)이 있는데 모두 월연의 달과 관계있는 이름이다.

암새들

  • 장선마을의 동남쪽에 있는 들로서 옛날에는 암소(岩沼)들이라고 하였다. '岩' 자는 용두산 용두암의 岩자를 따고 '沼' 자는 들 가운데 크고 작은 소가 많이 있어서 '沼' 자를 따서 암소들이라고 하였는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변해서 암새들이 된 것이다. 사라호 태풍때 홍수로 말미암아 완전히 '沼'가 묻혀버리고 현재는 약간의 형태만 있을 정도이다.

장선나루 (長善 津)

  • 장선마을앞 응천강 가에 있었다. 단장면, 산내면, 구서원으로 가는 소로(小路)의 나루터다. 지금은 없어졌다.

활성동(活城洞)

  • 동사무소에서 동쪽으로 4Km 떨어져 있으며 현 활성1통인 살내(活川)와 활성2통인 구서원 즉 옛 덕성(德城)의 두 마을로 되어있다. 활천의 활과 덕성의 성을 따서 활성동이란 명칭이 되었다.

살내마을 (현 활성1통)

  • 본래의 이름 살내를 한자로 전천(箭川) 또는 활천(活川)으로 표기하였다. 마을 뒷산에 화살대(箭竹)가 많이 나고, 마을앞 내(川)가 활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살내라 하였다.

구서원(옛 德城서원, 현 활성2통)

  • 용이 엎드려 잠자고 있는 형국이므로 잠든 용에게 종을 울려 깨우기 위하여 자씨산 (慈氏山)에 절을 세운 것이 영원사인데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초기로 추정하고 있다. 절을 폐한 그 터에다 1567년(명종22년)에 부사 이경우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위해 덕성서원을 창건하여 퇴계 이황 선생께서 손수 쓰신 점필서원이란 현판을 달고 향중 사림들의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1637년(인조 15년)에 서원이 운례촌(현재 상남면 예림리)으로 옮긴 뒤에 마을 이름을 德城洞 또는 舊書院, 구손이라 한다.

금시당 (今是堂)

  • 함지산 아래 잣실(栢谷)이라는 골이 있는데 월연정(月淵亭)앞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여기 이르러 한 굽이를 이루고 울창한 소나무 숲속에 솟아있는 것이 금시당이다. 今是의 뜻은 李光軫(이광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퇴하여 지금의 처신이 옳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금시당 경내에 따로 栢谷齊(백곡재)가 있는데 이광진의 후손 李之運(이지운)이 이 栢谷(백곡)의 지명으로 자기의 호를 삼았고 그 뒤에 그를 기념하여 이 건물을 세웠다. 문화재 자료 제 22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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