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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예림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양림간(兩林間)

예림리 동쪽 강가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옛날에 강물의 범람을 막아 전답을 보호하고자 심은 운례수 한가운데 숲과 숲 사이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림간 마을이라 했으나 지금 그 숲은 없어졌다.

운하마을(울리, 運禮)

예림 본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운례에서 파생된 이름인 듯하다. 운례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그 안 마을에 해당하는 운내와 대칭되는 지명이다.

운내(안골, 울례, 運內, 運谷)

예림리에서 가장 안쪽 산 밑에 있다 하여 안골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運禮라는 옛마을을 가리킨다. 운래의 이름의 유래는 을자형으로 굽이 돌아 흘러온 응천강 물이 이 마을앞에 이르러 정체되지 않고 운세대로 직류하는 곳이라 하여 운류(運流)가 운례로 표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촌(단촌,단천,唐村,唐泉)

예림 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여름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가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으나 물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잠시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타고 온 말이 말발굽으로 땅을 파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그 물맛이 꿀맛같이 달았다고 하여 그 후 사람들이 단물이 나는 샘이라 하여 단샘 또는 단천이라 했으며, 단천의 마을이란 단촌,당촌으로 전와(轉訛)한 지명이라 한다.

동촌(東村당, 양철마, 참나무징이)

예림 앞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일제 시대때에 형성되었다. 곧 일본인 농장주 탕천이란 자가 계속하여 양철 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 후에도 계속하여 일본인 농부들이 즐겨 양철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자연 양철집 마을이 되었다. 그리하여 양철마라는 이름이 생겼고 예림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또 옛날 이 부근에는 참나무숲이 있었으므로 참나무징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대성동(大成洞)

기산리와 예림리에 걸쳐 있는 들마을인데 일부는 기산리에 일부는 예림리에 속해 있는 신생 마을이다. 큰 성공을 기원하는 동민들의 뜻을 풍기는 지명이다.

기산(岐山, 箕山)

기산(岐山)은 본래 기산(箕山)으로 표기했는데 그것은 뒤쪽의 키 모양과 같다고 해서이다. 그러나 키는 앞이 트여 벌어져서 키질을 할 때마다 곡식이 날아가므로 마을의 복과 부가 빠져나가서는 안된다 하여 키의 앞쪽에 해당하는 마을 앞을 가로 막는다는 뜻에서 기산(岐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고늬실(古老谷, 古內谷, 古魯谷)

고실 북쪽 산 기슭에 위치하였고 고실 보다 먼저 생긴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인데, 고실의 안쪽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에서 고내실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으나 대채적으로 고노(古 魯)또는 고노(古老)로 표기했다.

푹실(牛谷)

기산리 본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는 골짜기로 이루어진 터전 이었으나 아주 오랜 옛날에 큰 비가 내려 산 사태가 지는 바람에 골짜기가 온통 메워지자 평지와 같이 되었다. 푹실이란 지명은 골짜기에 산이 푹 내려앉아 마을이 이루어졌다는데서 생긴 것이고, 우곡(牛谷)이란 표기는 큰 비로 인하여 동네가 된 골이라는 뜻이다.

이듬(이드미, 이담, 伊淵, 伊冬音)

내금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한 고촌이 다.지명을 이듬,이드미,이담이라 한 것은 옛날 이동음부곡(伊冬音部曲)에 서 파생된 것이다. 이연이란 한자 표기는 옛날 이곳에 가연이라는 못이 있어 이동음(伊冬音)과 가연(柯淵) 두 지명을 아울러 취한 듯하다.

내금(內今, 舊金洞 또는 今洞, 안금동)

안쪽에 있는 금동이라 하여 내금이라 하였는데 외금과 대칭되는 지명이다. 본래 금동은 옛날에 금동 역이 있었던 곳으로 동으로 삼랑진읍까지 25리, 서쪽으로 무안면까지 35리, 남으로 하남읍까지 30리인데 사방팔방으로 역원을 둔 영남대로상의 교통요충지였다. 금동(金洞)을 지금과 같이 금동(今洞)으로 지명을 바꾼 것은 금자(金字)의 뜻이 강하고 소리가 나며 부딕힐 때 불꽃이 튄다 하여 부드럽게 완화하기 위하여 같은 음인 금자로 취한 것이라 한다.

외금(밖금동, 驛今洞, 外今)

내금의 동남쪽 국도변에 있는 큰 마을이 다. 일명 역금동이라 한 것을 보면 이곳이 옛날 금동역의 역말 중심이 며 내금에 대칭되는 마을이다. 기록상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영남대로의 교통 요충지로서 그 전성시에는 역장을 비롯한 역사, 역졸, 역노, 관비 등 종사원만도 300명이 넘었고 대, 중, 하로 구분한 역마가 수십 필이나 되어 왕래하는 관인들과 여행객으로 붐빈 도회였다고 한다.

평촌마을(平村部落)

평촌이란 지명은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서북쪽 낮은 산기슭에 등을 지고 응천강의 흐름을 동남쪽으로 바라볼수 있는 배산임수의 평화스러운 마을이라 할수 있다. 동명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을 비롯한 크고 작 은 국난을 당했을 때 이 마을만은 피해를 당하지 않고 평화를 지킬수 있었다는데서 평촌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동네는 평안하고 살기가 좋아 날이 갈수록 인구가 늘어났는데 1982년에는 단위마을로는 너무커 서 1구,2구,3구로 행정단위를 구분하였다.

대흥동(대흥동)

평촌에서 동북쪽 응천강 가에 자리잡은 들 가운데 있 는 마을이다. 1030년 전후에 응천강 제방공사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숙 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가건물을 공사를 마친후에 개조하여 민가로 삼고 그 자리에 눌러 앉음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은 당시의 주민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한번 크게 일으켜 보자는 결의의 뜻으로 1932년에 마을총회에서 결정한 것이다.

말미(馬山, 馬山院, 馬山驛)

동네 안산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라 불리어 오고 있는 고촌이다. 마을 안 이곳저곳에서 지석묘와 각종 석기, 패총 유물 등 매장 문화재가 발견된 일이 있어 선사시대 이래의 주거지 임을 짐작하게 하는 곳이다. 이 마을 서쪽에 이웃해 있는 무량원이란 관영 여숙(旅宿)이 조선초기에 폐쇄되어 옮겨온 후 무량원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금동역이 백족으로 옮겨지고 백족에서 다시 이 마을로 옮겨짐에 따라 마산원이 역으로 승격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곳은 역 마의 사육과 관리 등으로 말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고 영남대 로의 교통 요지로서 관인과 여행객의 출입이 빈번한 도회를 이룬 마을 이다. 그러나 역은 곧 없어지고 원도 제도의 폐지와 함께 그 자취가 사라졌다.

무량원(無量院)

마산리 서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 초 기 이래의 원(院)터가 남아있다. 원이란 역과 역 사이 또는 역 부근에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들을 위하여 설치한 국영의 여숙소(旅宿所) 같 은 곳인데 원집 이라고도 하였다. 원집에는 원주를 두어 소속된 전답을 경작하여 경비충당을 했으며 인근의 승려들을 원주로 삼은 경우가 많았 다. 이 곳에도 옛날부터 절이 있었으며 무량이란 지명도 절 이름과 관 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산(배죽, 白足, 白竹, 仁山)

중세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동국여 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운막향의 옛터라 하여 속칭 백족(白足)이라 고 표기하였다. 옛날 마산 앞에 있는 돌더미에서 백마가 나타나 강물을 마시고 사라져 버린뒤에 그 발자국을 남겼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동산(東山)

배죽의 남쪽 들가운데 서쪽 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다. 동산이라는 독뫼(獨山)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촌인데 어은동과 외산 리와 인접하였다. 조선 후기에 창녕조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으며 창녕 성씨의 구거지 이기도 하다.

외산(外山)

외산리의 본동으로 행정구역이 다른 동산과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외산이란 지명에 대하여는 오산들 너 머에 있는 바깥 산 마을이라는 일설과 동산 바깥에 있는 들 마을이라는 다른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오산(오미, 吳山, 鰲山, 吳山)

외산리 가장 큰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 인데 오미 또는 오산(吳山)이라 부른다. 한자상의 표기로는 원래 오산 (鰲山)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독뫼의 형상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생긴 이름인데 그 뒤 오산(吳山)으로 바뀐어진 것은 글자 쓰기가 너무 어려운 데다가 이 마을에 오씨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바꾸었다는 일 설이 있다. 오산(烏山)이라는 지명에 대하여는 어느때 낙동강이 범람하여 온 들판 이 물에 잠겼는데 이 마을 독뫼의 꼭대기만 물 위에 나와 있어 그 곳에 까마귀들만 남아서 까옥까옥 울었다는 설화에서 기인된 것이라 한다.

어은골(魚隱谷, 魚隱洞)

큰 어은동과 작은 어은동으로 땅이 나누어져 있다. 풀숲이 우거진 마을앞 질펀한 늪속에 물고기가 숨어 살았다 하여 어은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곳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보아 제방이 없었던 시절에는 낙동강 물이 밀어닥쳐 마을 앞 숲속으로 고기가 숨이 들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조동(棗洞, 召音)

조음리의 본동이 곧 조동인데, 서쪽 들판에 위치한 조서와 대칭되는 이름이다. 마을의 동,남,북 셋방향이 모두 산으로 둘러 싸이고 서쪽으로 하남 평야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아늑한 옛 마을이 다. 밀주구지 등 옛 문헌에는 마을이름이 소음(召音)으로 되어 있는 바 이는 소자의 속음화에 따라 후일에 음이 동일한 조음으로 표기된 것이다.

조서(棗西)

조음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임 지명이다. 조동 을 조음 본동이라 한다면 조서는 조음의 서부 곧 명성과 하남읍 남전리 에 속하는 효자문껄을 아울러 지칭하는 곳이다.

남산리(南山里)

북쪽으로 종남산이 서쪽으로 덕유산이 병풍처럼 둘려 지고 동쪽에만 들판이 전개된 산중 마을이라 할수 있다. 종남산 아래쪽 에 있다고 하여 남산리가 되었는데 옛날에는 남산에 영은사와 봉수대가 있어 비교적 마을에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본래의 동명(洞名)은 구법리 혹은 구박리하고 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동, 평 리, 새마를 아울러 남산리가 되었다.

평리(平里)

남산 동남쪽의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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