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지의 중앙부를 남류하는 청도천에는 동·서부 산지에서 발원하는 많은 소지류가 합류하여 하천 양안에 하안평야가 발달하였으나, 전체적으로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농업은 밭농사가 우세하여 보리·콩 등의 산출이 많고, 소·돼지·닭 등의 가축을 사육하고 있다. 특산물로 청량고추가 있고, 산지에 단감나무단지를 개발하였다. 밀양과 창녕 방면으로 국도와 지방도가 통하고, 인접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발달하여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무안면의 중심으로 무안면사무소,무안파출소,무안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으며 무안시장이 이곳에 있어 매 1,6일 장날마다 많은 주민들이 시장을 보기위해 모여든다. 문화재로 표충비각이 자리하고 있음.
마을소개
유물, 유적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각이 있음.(상세한 설명은 무안면 유적 참조)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진등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음. (산등성이가 길다는뜻에서 생긴 지명)
창고터 : 홍제사 뒤편 일대에 있던 창고터인데 이곳에 옛 밀양부의 외서창이 있었다고 한다.
디청들 : 동네 죽쪽 일대의 들을 지칭하는 말로, 마을 뒤편에 있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 방면 버스 이용(20분소요)
서부리
소재지 마을로서 서편 동네이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며 행정마을중에서 가구수 및 인구수가 제일 많은 큰 마을이다.
정주권개발사업으로 문화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지명유래
소재지 마을로써 서편 동네이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 방면 버스 이용(20분소요)
부로리
법정리는 무안리이고 행정리가 부로리인데 부로라는 말은 예로부터 노인을 공경하는 예의 바른곳이란 뜻으로 뜸북골(학골), 치마바위, 대밭골, 범골, 범등골, 불당골 등의 지명이 많은 마을임.마을앞에 금청들이라는 넓은 들녘이 있어 무척 풍요로운 마을임.
지명유래
원래 하서면의 한 지역으로 옛지명은 부로곡 또는 근곡이라 하였으나 1914년에 무안리에 통합됨.
영치산의 지맥이 서남으로 향하다 다시 청도천과 나란히 남으로 뻗었는데 이를 뒷산으로 무안리와 마주하여 형성된 마을임.
뜸뿍골 : 부로리 왼편에 있는 첫 번째 골짜기이다. 산세가 뜸부기 형국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금청들 : 부로리 입구의 들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부로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 방면 버스 이용(20분소요)
신법리
무안리와 인접하고 있는 마을로써 옛 지명은 신법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선비가 새 예법을 만든일이 있다고 하여 마을명을 현재의 신법이라 하였다. 자연마을로써 내촌, 외촌으로 나뉘어지며
밀양공고 및 무안중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옛날 이곳에 사는 어떤 선비가 새 예법을 만든 일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새로운 법 즉 신법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청도면 조천리 뒷산인 지불 등이 남쪽으로 뻗어 내려와 하서산에 이르는데 그 아래쪽에 위치한 동네임. 북으로는 화봉리와 삼태리, 남으로는 무안리, 동으로는 정곡리, 서로는 서로는 중산리와 인접하고 있으며 청도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삼거리 : 신법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도로가 삼거리라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10여호의 민가가 있다.
지명유래
옛날 이곳에 사는 어떤 선비가 새 예법을 만든 일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새로운 법 즉 신법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신법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 방면 버스 이용(20분소요)
삼태리
밀양박씨의 집성촌으로 자연마을로는 당두, 태봉, 오숲골, 굴밑 등으로 이루어져 있은 마을이다. 당두 마을의 동편에 경계부분에 지석묘가 1기가 있었는데 1988년도 경지정리시 매몰되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삼태리는 본래 하서면의 한 지역으로써 마을 한가운데 큰 바위(지석묘)가 세 개 있었다고 하여 삼태리라 하고 그바위를 삼태바위로 불렀다 한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삼태리는 본래 하서면의 한 지역으로써 마을 한가운데 큰 바위(지석묘)가 세 개 있었다고 하여 삼태리라 하고 그 바위를 삼태바위로 불렀다 한다.
청도면 조천리 지불등에서 한 줄기가 당고개의 능선을 따라 동남으로 뻗어 내려와 물박산에 이른다. 또 한줄기는 동남으로 뻗어 내려와 하서산에 이르는데, 그 사이에 삼태천이 흐르고, 이 삼태천과 청도면에서 내려오는 청도천을 끼고 형성된 마을이다.
당두 : 삼태리의 중앙마을로 옛 지명은 당북리였다. 마을의 형국이 말과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태봉 : 당두 마을 서편에 있는 마을로 조야산리였다. 이 마을 뒷산에 당성공주의 태가 안치 되어 있다고 태봉이란 지명이 나온 것이라 한다.
오숲골 : 당두 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까마귀가 많이서식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 방면 버스 이용 신법삼거리 하차(20분소요)
화봉리
옛 이름은 하봉이라 했다고 하며, 마을뒤산의 모양이 꽃봉우리를닮았다고 하여 화봉이라고 하다가 峰 자가 封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마을 중심에 정자나무 숲이 있어 여름철 땀을 식히는데 일품이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화봉리는 청도천의 천왕산이 남으로 뻗어 조천의 뒷산인 지불등에 이르고 지불등에서 한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물박산에 이른다. 또 한줄기도 동남으로 뻗어 하서산에 이르는데 그사이에 삼태천이 흐르고, 이 삼태천의 상류를 끼고 형성된 마을이 華封里인데 옛 이름은 河峰이라 했다고 한다.
초전 : 화봉리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대가 낮아 항상 물이 고여 있어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화봉방면 버스 이용
기타
마을 중앙에 아주 오래된 마을 정자나무(느티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어 주민들의 쉼터로 아주 유용하며 특히 한그루는 밀양의 시목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영신리
모곡위쪽에 위치한 마을로써 화봉리에서 제일 나중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라고 부르다가 영신리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써는 보리밭골, 영안, 서당골등으로 이루어져 있음. 법정리는 화봉에 속한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화봉리는 청도천의 천왕산이 남으로 뻗어 조천의 뒷산인 지불등에 이르고 지불등에서 한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물박산에 이른다. 또 한줄기도 동남으로 뻗어 하서산에 이르는데 그사이에 삼태천이 흐르고, 이 삼태천의 상류를 끼고 형성된 마을이 華封里인데 예 이름은 河峰이라 했다고 하는대 화봉리의 위쪽을 영신리라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화봉방면 버스 이용
기타
마을 중앙에 아주 오래된 마을 정자나무(느티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어 주민들의 쉼터로 아주 유용하며 특히 한그루는 밀양의 시목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죽월리
본래 하서면 지역으로 옛 지명은 대월 또는 죽월 이라고 한 것은 옛날 마을 앞뒤에 죽림이 무성하여 그 형태가 마치 달과 같다고 하여 붙였다고 하기도 하고 이 마을이 달과 같은 형국인데다 마을 뒤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이라고도 한다.
마을소개
유물, 유적
마을입구 도로변에 큰 정자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아주 오래되어 밀양시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마을에서 해마다 당제를 지내고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죽월리는 본래 하서면 지역으로 옛 지명은 대월 또는 죽월 이라고 한 것은 옛날 마을 앞뒤에 죽림이 무성하여 그 형태가 마치 달과 같다고 하여 붙였다고 하기도 하고,
이 마을이 달과 같은 형국인데다 마을 뒤에 대나무가 많이 자생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 이라고도한다.
청도면 뒷산인 지불등이 동남으로 뻗어 내려와 당고개, 대월고개에 이른다. 다시 대월고개에서 한 줄기가 동으로 뻗어 부치덤산에 이르고 또 한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강지잇골에 이른다. 그 사이에 청도천을 끼고 동향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당산걸샘 : 죽월마을 서쪽에 있는 골짜기에 있는 샘으로 피부병에 효과가 있다함.
부엉디미 : 삼태리와 경계를 이루는 산기슭으로 옛날에 부엉이가 많이 서식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붉은등 : 죽월 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흙 색깔이 붉은 황토로 덮여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죽월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양효리
이 마을에는 300여년 전에 충의수 李而栢이 입촌한 후 벽진 이씨가 지금까지 세거해 왔다. 지금은 여러 성씨가 모여 함께 살고 있다. 2개 자연 마을으로 구 성되어 있으며 대다수가 농민이며 주요 농산물은 수도작, 딸기, 수박, 고추등으 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며 옛지명은 곡양이다. 자연마을로는 곡양과 효우촌으로 나뉘는데 효우촌은 람회당 이이두가 만년에 오우당을 짓고 오형제가 기거를 함께하며 독서와 효우를 몸소 실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마을명 이며 오우당의 자리는 구 내진 초등학교라고 한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양효의 웃마 뒷산에 있는 북쪽 골짜기에 절터가 있었다고 하며 이곳에 약물샘이 있어서 약효가 있었다고 한다. 어느 시대의 절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주춧돌과 기와조각등을 볼수 있는데 빈대 때문에 스님들이 기거할 수 없어 폐사가 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절터주위의 돌에는 죽은 빈대 겁질이 남아 있다고 하며 지금도그 골짜기를 절터골이라 부른다.
유물, 유적
선사시대의 유적으로 양효리 부치덤산의 고분군과 조산들에서 1998년 경지정리때 발견된 석관묘 유적이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옛지명은 곡양이며 자연마을로는 곡양과 효우촌으로 나뉜다.효우촌은 람회당 이이두가 만년에 오우당을 짓고 오형제가기거를 함께 하며 독서와 효우를 몸소 실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마을명이며 오우당 자리는 구 내진초등학교라 한다.
청도면 뒷산인 지불등이 동남으로 뻗어 내려와 당고개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한 줄기가 내려와 의봉산에 이른다. 또 당고개에서 한줄기가 동남으로 내려가 부치덤산에 이른다. 그 사이에 곡량동이 있고, 의봉산의 남쪽 기슭에 효우촌이 있다.
곡량 : 옛날 玄씨가 기거하여 골이 깊고 물이 맑을 뿐 아니라 토지가 비옥하여살기 좋은 곳이라고 곡량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효우촌 : 람회당(覽懷堂) 李而杜가 만년에 오우당을 짓고 오형제가 함께 기거를 함께 하며 독서와 효우를 몸소 실천하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오우당의 자리는 지금은 폐교된 내진초등학교라고 전해진다.
조산들 : 양효 앞들을 말하는대 청도천을 끼고 있다. 1988년 경지정리때 석관이 출토된 곳이다. 옛날 이곳에 造山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양효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내진리
벽진 이씨의 집성촌이고 옛지명은 내진도이며 일명 통가라고 한다. 이 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까지 존속해 오다가 15세기 말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내진리는 신라때의 비진사에서 그 이름이 유래 되었다고 한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옛지명은 내진향이며 일명 통가라고 한다. 이 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까지 존속해 오다가 15세기 말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는 신라시대 飛進寺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내진이란 마을명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유물, 유적
용안서원(내진리 173번지)
용안서원(龍安書院)은 문안공산화 이견간(文安公山花李堅幹先生)과 성산군 이식(星山君李軾)을 봉향(奉享)하기 위해 내진리 영화곡(來進里靈華谷)에 1813년(조선 순조 13)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두 분의 향사(享祀)를 위해 별사를 창건하였다가 영역이 좁고 당의 규모가 작아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기가 어려워 1818년(순조 18)에 현 위치인 용안동(龍安洞)으로 옮기고 용안사(龍安祠)라고 편액(扁額)하였다.
그러나 1870년(고종 7)에 국령으로 훼철된 후에 용안사를 용안재(龍安齋)로 개액(改額)하였고, 1922년부터 문중의 의결로 설단(設壇)하여 여은 이사지(麗隱李思之)와 대호군 이중림(大護軍李仲林)을 추봉(追奉)하여 용안사 옛터에 사우(祠宇)를 중건하고 재사(齋舍)를 중수하여, 1988년 고을 유림의 공의에 의해 용안서원(龍安書院)으로 격을 높혀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구월 中丁日에 향사를 봉행(奉行)하였다.
용안서원에 봉안된 주벽(主壁) 이견간(李堅幹)은 호를 국헌(菊軒), 또는 세칭 산화선생(山花先生)이라 하였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선생은 고려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 삼조에 걸쳐 통헌대부 진현관대제학 동지밀직사사 민부전서 상호군(通憲大夫進賢館大提學同知密直司事民部典書上護軍)을 역임하였는데, 도덕과 문장을 겸비하여 일세에 그 명성이 뛰어났었다.
1302년(충렬왕 28)에 경상도 춘추번안렴사(春秋番按廉使)가 되어 풍속을 관찰하고 공부(貢賦)를 살피며 상과 형벌을 엄하게 실행하여 나라일을 대행하였다. 또한 1317년(충숙왕 4) 에 중국으로 사신 가던 중 상주 객관(常州客館)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느껴『창너머 두견새 소리 밤새도록 들리노니, 네 울음에 지는 꽃이 몇 겹이나 쌓였을고.(隔窓杜宇終宵聽 啼在山花第幾層(격창두우종소청 제재산화제기층))』라는 시를 읊었는데, 이 시가 중국 곳곳의 헌함과 벽에 새겨져 선생의 이름이 천하에 드러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산화(山花)선생이라 일컬었으니 문학에 대한 선생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시 모두가 청구풍아(靑丘風雅)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오늘까지 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고 있다. 고려사에 의하면 당시 원나라 왕이 선생의 문장과 인품에 감탄하여 특별한 예우를 하면서 선생이 사는 곳의 이름을 묻자 속음으로 호음곡(戶音谷)이라 하였더니 명자(木命字)를 지어 곡명(谷名)을 하사하였는데 지금 성주의 홈실이 바로 그 곳이다.
조선조의 직제학 이설이 지은 「서정록후서」라는 책에『선생은 덕행이 높고 학문이 넓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선진(先秦)의 예악(禮樂)과 성당(盛唐)의 문장으로 칭송했으며,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태학사 주방(太學士周昉)이 함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배하면서 "선생은 천하 제일의 선비입니다. 삼한의 문화가 이런 경지에 이른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또 『옛날에 내가 운곡 원천석에게 들으니 고려조 중엽에 선비가 많았다고 하나 진실로 유교의 도를 따른 사람은 좨주(祭酒) 우탁과 문안 이견간과 문충 이제현 등 몇 사람 뿐이다.』라고 하였다.
여은 이사지(麗隱 李思之)는 산화선생의 현손으로서 병마도원수 희경(兵馬都元帥 希慶)의 아들이다. 부친 희경은 도원수가 되어 남도로 내려가 왜의 장수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은 적으로부터 해를 입고 순절하였다.
이사지도 고려 공양왕 때 중랑장을 지내고 왜구의 침입을 소탕하여 많은 공을 세웠는데,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이태조가 조선조를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지니고 두문동에 들어가 72현과 함께 절의를 지키며 수차례에 걸쳐 조선조의 벼슬을 거절하였다. 이에 세인들이 모두 아비는 충성에 죽고, 아들은 그 충성을 이었다고 하였다. 조선말의 학자 이만도는 그의 묘갈명에서 여은공의 절의는 곧 포은(圃隱)ㆍ목은(牧隱)ㆍ기우자(騎牛子)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대호군 중림(大護軍仲林)은 여은공의 아들로서 조선 세종조에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대호군을 지냈다. 여은공이 불사이군의 절의로 두문동에 자취를 감추었을 때 대호군은 십오세 전후의 나이었지만 부친의 엄한 훈육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덕성을 함양한 후 조선 왕조에 벼슬하여 국가를 위해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병란을 겪으면서 문헌이 산실되어 그 자취를 상고할 수가 없다.
성산군 이식(星山君李軾)은 호를 동파(東坡)라 하였는데, 여은공 사지의 증손으로서 문무(文武)의 재질이 빼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이 되었고, 연산군의 음란과 학정이 날로 심하여 종사(宗社)가 위태로워지자 1506년 박원종 등과 함께 정현왕후의 뜻을 받들어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녹훈(錄勳)되고 성산군에 봉하여졌다.
그러나 중종반정의 삼훈(三勳), 즉 박원종ㆍ성희안ㆍ류순정 등이 임금을 위협하고 왕비를 폐출시키자 공은 마침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났다. 관직에서 물러난지 얼마 아니되어 기묘사화가 일어나 옥석의 구별 없이 다 몰락했지만 속세에 초연했던 공은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이는 시경에 말했듯이 '밝고 또 지혜로와 그 몸을 보전한다.'는 말에 부합된다 할 수 있으리라.
성산군은 권력의 암투가 극심하자 멀리 떠나 밀양의 수동(壽洞)에 머물러 우거하다가 몇 해 아니되어 내진리로 이거하였고, 그 뒤 경치가 삼한의 으뜸이라는 고강(곡강)에서 유유자적하면서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치었다.
중종이 공에게 『家傳淸白 世守忠謹(가전충백 세수충근)』이란 찬문(讚文)을 내렸고, 또 사패지(賜牌地)를 내렸는데 지금도 후손들이 초동면 곡강동 경내에 일부를 보유하고 있다.
덕행과 학문으로 당대를 이끌어 가면서도 난세를 당해서는 먼저 헌신하였고, 충절을 위해서는 부귀영화를 헌신짝 버리듯 한 이분들의 생활 철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어찌 적다고 하겠는가.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국가와 민족을 외치는 위선자들이 우리 주위에 혹시 있다면 그들에게 용안서원에 모셔져 있는 선현들의 생애에서 자신의 모습을 되찾으라고 말하고 싶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옛지명은 내진향이며 일명 통가라고 한다. 이 향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실려있는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까지 존속해 오다가 15세기 말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에는 신라시대 飛進寺라는 큰 절이 있었는대 내진이란 마을명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조천리 뒤산인 지불등에서 산 줄기가 당고개의 능선을 따라 동남으로 뻗어 의봉산에 이르고, 그 아래쪽에 동으로 향해 위치한 마을이다.
정내(井泉) : 내진리 동족의 가운데 위치한 마을로 청도천이 이쪽으로 흘렀다고 하여 정내라 부른다고 한다.
비롯골 : 마을뒤 대밭 위쪽에 위치한 작은 골짜기로 비진사의 유적지가 있었다 하는대 비진사가 있던 골짜기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가 음이 변하여 비롯골이라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장성잿골 : 마을 뒷산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서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고 절이 하나 있다.
청룡동 : 내진 마을 뒷산 서북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청도천과 경계를 이루는대 마을에서 보면 좌청룡에 해당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내진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동산리
동산마을은 옛날 뒷산에서 구리(銅)가 났다고 하여 구리미(뫼)하였고 이를 한자어로 바꾸어 동산이라고 일컬음. 일설에는 9개의 마을으로 형성되어 구리미라 했다고도 한다
자연마을로는 까막소, 원당골, 영남촌, 서덩각단, 부림촌등이 있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동산리는 마을뒷산에서 구리(銅)가 생산되었다고 하여 구리미(뫼)라 하였고 이를 한자어로 바꾸어 銅山이라 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9개의 마을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구리미라 했다고도 한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지사역(只士亦)이라 하였고 후대에 동산리라 불렸다 한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동산리는 마을뒷산에서 구리(銅)가 생산되었다고 하여 구리미(뫼)라 하였고 이를 한자어로 바꾸어 銅山이라 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9개의 마을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구리미라 했다고도 한다. 밀주지(密州誌)에 의하면 지사역(只士亦)이라 하였고 후대에 동산리라 불렸다 한다.
화악산의 한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내려 팔방재에 이른다. 이 곳에서 한줄기가 남으로 뻗어 앞고개와 대불산에 이르고, 또 한줄기가 서남으로 뻗어 천마봉을 지나 까막소 마을에 이른다. 이 산기슭 아래쪽에 동산리가 있다.
까막소 :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멀리서 보면 까마귀가 많이 앉아 있는 것처럼 까맣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동네이름이며 상업을 위주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 형성된 마을이다.
서당각단 : 까막소 마을 동편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이 형성되기전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남촌 : 서당각단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경지정리 전에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 지른 애기둑이 있었는대 이둑이 청도면과 경계를 이룬다.
원당골 : 영남촌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서원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동산리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여 아랫구리미라 부르기도 한다.
지사역(只士亦) : 까막소 마을에서 서당각단으로 간즌 길목에 위치한 마을로 이곳이 동산리의 본동네로 추정된다. 지금은 마을은 없어지고 돌담등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동산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판곡리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대불산 아래 청도천을 앞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지세가 배의 형상이라 한다. 판곡이란 마을 이름도 배의 널빤지를 본 따 널실로 하다가 "ㄹ"음이 탈락되면서 너실로 바뀌었고 이를 한역하여 판곡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마을로는 너실과 점터가 있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대불산 아래 청도천을 앞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지세가 배의 형상이라 한다. 판곡이란 마을 이름도 배의 널빤지를 본 따 널실로 하다가 "ㄹ"음이 탈락되면서 너실로 바뀌었고 이를 한역하여 판곡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판곡리라 하고 1933년 무안면에 편입됨. 자연마을로서는 너실과 점터가 있다.
유물, 유적
마을 앞들을 가로 질러 동서로 칠성바위라 일컫던 지석묘 7기가 있었으나 88년 경지정리때 다 매몰되었으며 그중 1기에서 석관묘,마제석검1점,대룡옥 수점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유물의 소재를 알수가 없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대불산 아래 청도천을 앞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로 멀리서 보면 지세가 배의 형상이라 한다. 판곡이란 마을 이름도 배의 널빤지를 본 따 널실로 하다가 "ㄹ"음이 탈락되면서 너실로 바뀌었고 이를 한역하여 판곡으로 불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판곡리라 하고 1933년 무안면에 편입됨. 자연마을로서는 너실과 점터가 있음.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이룬 대불산 아래 청도천을 앞으로 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너실 : 판곡이란 명칭이 붙여진 마을로 지금은 윗마, 아랫마로 나뉜다. 이곳에 김녕김씨의 죽산제가 있고 김녕김씨와 밀성박씨의 세거지이다.
장군실 : 너실마을 윗동네와 아랫동네 사이에 있는 산등성이로 이곳에 넙덕바위가 있다. 옛날 이곳에 장군이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말미등 : 너실마을 장군실 위쪽의 등성이로 이 곳에 큰 묘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사실 말묘가 아니지만 묘역이 크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배나무골 : 너실마을에서 노루실로 넘어가는 서편 골자기로 고개정상에 돌배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배나무고개라 부른다.
점토 : 예전에 마을에서 기와를 구웠다고 하여 점터라 부른다.
당고개 : 점터마을에서 정곡리로 넘어가는 고개.정상에 당(堂)나무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또 낮고 짧은 고개라 하여 단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판곡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운정리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앞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우령산으로 내려가는 줄기와,대불산을 이루어 배산에서 그치는 줄기가 있는데, 그 양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자연마을으로 운정본촌, 노루실, 안지마, 안마가 있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앞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우령산으로 내려가는 줄기와,대불산을 이루어 배산에서 그치는 줄기가 있는데, 그 양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본래 밀양부 하서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장곡(獐谷), 안지말과 합쳐 운정리가 되었다.옛날에는 굼보라고 했다고도 한다. 진주유씨와 완산전씨의 집성촌이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앞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우령산으로 내려가는 줄기와,대불산을 이루어 배산에서 그치는 줄기가 있는데, 그 양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본래 밀양부 하서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장곡(獐谷), 안지말과 합쳐 운정리가 되었다.옛날에는 굼보라고 했다고도 한다. 진주유씨와 완산전씨의 집성촌이다.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앞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우령산으로 내려가는 줄기와,대불산을 이루어 배산에서 그치는 줄기가 있는대, 그 양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운정 : 운정리의 본담으로 앞산인 굴산의 필봉을 마주하고 있다.
노루실 : 본촌의 서북족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이 노루처럼 우뚝 솟은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대 10여호가 거주하고 있다.
안지마 : 운정본담에서 정곡으로 가는 농로길상에 있으며 원래 안씨가 거주하여 안씨마을이라고 하다가 이말이 변했다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고 운정 안쪽 마을이라고 하여 안마을로 부르던 것이 축약되어 안지마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운정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백안리
우령산의 서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백안동이라고 한 것은 우령산의 서편 한 지맥이 뱀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배암동이라고 했는데 그 음을 표기하면서 白眼洞, 百安洞 등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자연마을으로 백안,어은동,새각단이 있다. 충주석씨의 집성촌이고 밀양 부북으로 넘어가는 날뛰고개가 있는 마을이다.
한우를 많이 사육하고 있는 마을로 한우사육이 34호에 630여두에 달한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화악산의 지맥이 남으로 뻗어 앞고개에 이르고, 여기서 다시 우령산으로 내려가는 줄기와,대불산을 이루어 배산에서 그치는 줄기가 있는데, 그 양 산줄기가 감싸고 있는 자리에 위치한 마을이다. 본래 밀양부 하서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장곡(獐谷), 안지말과 합쳐 운정리가 되었다.옛날에는 굼보라고 했다고도 한다. 진주유씨와 완산전씨의 집성촌이다.
풍수지리 및 주요지명
백안동이라고 한 것은 우령산의 서편 한 지맥이 뱀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배암동이라고 했는데 그 음을 표기하면서 白眼洞, 百安洞 등으로 변하였다고 함. 자연마을으로 백안,어은동,새각단이 있다.
화악산의 한 지맥이 남으로 뻗어 고암산, 우령산을 이루고 그 아래 서쪽에 모여있는 마을이다.
백안동 : 우령산의 서편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다. 백안동이라고 한 것은 우령산의 서편 한 지맥이 뱀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배암동이라 했는데 그음을 표기하면서 백안동으로 변했다고 한다.
어은동 : 밀양에서 무안으로 고개를 넘어오면 처음으로 나오는 동네이다. 약 400년전에 어영하라는 효자가 살았는데, 進士에 급제한 선비이면서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하면서 미풍양속을 계도하였다고 하는대 어씨가 은거한곳이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도 어효자의 사적을 기록한 효자각과 비석이 날뛰고개 중간쯤에 서 있다.
새각단 : 백안동과 어은동 사이에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하여 신촌 혹은 새각단이라 부른다.
날뛰고개 : 어은동에서 새각단을 거쳐 부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고개의 정점이 부북면과 무안면의 경계이며 옛날부터 결혼할 때 이고개를 지나지 않는다는 풍습이 전해져 아직도 결혼시에는 이 고개를 넘지 않는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백안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가복리
백안과 운정리 사이에 있는 마을로 이마을 뒷산에 거북같이 생긴 귀알이란 바위가 있다고 하여 거북동이라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복동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경주이씨의 집성촌이며, 자연마을로는 가복본동, 점동, 지정이 있다. 특히 점동에서 지정으로 넘어가는 개고개 정상에 약 300년전에 세워진 의구비가 있다. 한우를 많이 사육하고 있는 마을로 한우사육이 30여호에 800여두에 달한다.
마을소개
마을 약사(전설)
백안과 운정리 사이에 있는 마을로 이마을 뒷산에 거북같이 생긴 귀알이란 바위가 있다고 하여 거북동이라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복동으로 바뀌었다고 함.
유물, 유적
의구비(義狗碑) : 가복점동에서 지정으로 넘어가는 작은 고개에 있는 비로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고 주인을 살려낸 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또한 이 고개를 개고개라 부른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백안과 운정리 사이에 있는 마을로 이마을 뒷산에 거북같이 생긴 귀알이란 바위가 있다고 하여 거북동이라 했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가복동으로 바뀌었다고 함.
화악산의 한 지맥이 남으로 뻗어 고암산, 우령산을 이루고 그 아래 서쪽에 모여있는 마을이다.
참나무진 : 어은동과 가복동 사이에 있는 망ㄹ이다. 옛날에 참나무가 많이 있엇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점동 : 참나무진 서편의 도로변위.아래쪽에 걸쳐 있는 마을로, 옛날 이곳에서 기와를 구워 팔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데 충주석씨의 평후정이 있다.
지정 : 가복리 동쪽끝 왼편에 위치한 마을로 저정산의 아래쪽에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주막과 양조장이 있어 오가는 여객들의 쉬는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폐가만 있으며 뒷산 골짜기에 지정사가 있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구마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가복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신생리
나환자 촌으로 필생의 신념을 가진다는 뜻으로 신생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주민들의 주 소득원은 가축사육이며 마을 위쪽 능선에 밀양시쓰레기 매립장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1945년부터 3,4명의 나환자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각 처의 나환자가 몰려 들었고 1949년 수용소로 지정되었고, 필생(必生)의 신념을 가진다는 의미로 신생원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신생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창녕, 청도방면 버스 이용
정곡리
정곡이라고 한 것은 정곡 본동인 솥질에서 보면 세 방향의 산이 솔밭처럼 마을을 향해 모였다고 하여 솔길이라 하였고 이를,한자어로 바꾸면서 정곡이라고 했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솥질, 나무골, 무덤실, 신화, 조무실, 단장이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정곡이라고 한 것은 정곡 본동인 솥질에서 보면 세 방향의 산이 솔밭처럼 마을을 향해 모였다고 하여 솔길이라 하였고 이를,한자어로 바꾸면서 정곡이라고 했다고 함.
유물, 유적
신남서원(경상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256호)
무안면 사무소에서 밀양시청 쪽으로 4㎞ 정도를 가면 화악산의 한 줄기가 남으로 뻗어 내려온 곳에 정곡리가 있다. 앞산의 산줄기가 세발 솥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솥질, 이를 한자 표기로 바꾸면서 정곡(鼎谷)리가 되었다.
이 마을 가장 안쪽, 신야촌(莘野村)이라 부르기도 하는 새터에 고려 말 대마도 정벌의 위훈과 위화도 회군에 공이 컸던 충의백 정국군 박위 (忠義伯靖國君
朴위)장군과 조선초의 문신인 조선참판 박기(吏曹參判 朴耆)선생 부자(父子)를 봉향(奉享)하는, 경상남도 문화재 제256호로 지정된 신남서원(莘南書院)이
자리잡고 있다.
1822년(순조 22년)에 후손인 박성기(朴聖基)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士林)들이 공론을 모아 이 서원을 창건하였는데 사당을 상모사(尙慕祠),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이라 편액하고, 응교 강세백(應敎 姜世百)이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지었으며, 신도비(神道碑)는 창원시 용지공원 경내에
서 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년)에 이르러 나라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철폐된 후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로 삼아 후손들에 의하여 서원의식에 따라 향사를 받들어 왔었다.
그후
1981년에 후손들의 발의와 밀양 유림들의 공의(公議)로 서원을 복원하여 상모사(尙慕祠)를
그전대로 중건하였고, 1984년에는 복원에 따른 고유제(告由祭)도 올려 지난날의 서원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 신남서원은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획하였고, 바깥에 강당인 경보당이 있으며 경내에 박위 장군과
박기 선생의 제단비가 있는데 밀성박씨 정국군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신남서원에
봉향된 정국군 박위(靖國君 朴위)(1332∼1398)는 공민왕초에 우달치(于達赤)로 보임되었다가
김해, 진주, 계림 고을의 수령을 거쳐서 세 번이나 합포의 진수(鎭守)를 하였다.
박위 장군의 큰 전적으로는 황산강 싸움과 대마도 정벌 등을 들 수 있는데 전략상으로는 김해 분산성과 동래성의 축성, 그리고 울산 신학성 축성의
자문과 그것의 준공일 것이다. 1375년 겨울 왜구가 침범하여 김해가 폐허화되었을 때 부사로 부임하여 난민 구호와 파괴된 가옥의 복구를 위해
전심전력하였다. 김해는 원래 삼면이 물과 갈대로 둘러싸여 왜적이 쉽게 침입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분산성을
구축하였는데 후에 황산강 싸움 때 이 산성을 이용하여 적을 크게 물리쳤다.
지금도
분산성 경내에 박위 장군의 축성 사적비가 남아 있고, 분산성은 사적(史蹟) 66호로 지정되어
있다. 1384년에는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재임시 성균사예 이문화(李文和)가 당시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화되어 있던 울산 복구를 위하여 자문을 구하자 울산 신학성 축성을
권유하였고, 성곽이 완공될 무렵 박위는 원수 겸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가 되어
합포로 진을 옮기게 되었다.
1388년에는 경상도상원수(慶尙道上元帥)로서 요(遼)의 정벌에 나섰다가 회군하여 경상도 절제사(節制使)가 되었고, 1389년 2월에는 대마도정벌에
나섰다. 그때 일본은 대마도와 일기도를 중심으로 고려의 변방을 약탈하고 방화, 살륙을 자행하였다.
그때마다 고려는 방어에만 힘썼고 일본에 사자를 보내어 왜구의 금지를 교섭하였지만 일본 막부의 명령은 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박위는
부사로서 김해 분산성(盆山城)을 쌓고 도순문사(都巡問使)로서 신학성(神鶴城)을 완공케하고 동래성을 쌓아 왜구를 방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전함 100척을 인솔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서 대승하였다.
후에
이성계를 도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오르고
충의백(忠義伯)으로 봉해졌다. 조선 개국후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지내고 정국군(靖國君)에
봉해졌다. 즉 장군은 국난 극복의 굳은 신념과 자연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왜적 방어에
대비하겠다는 장수로서의 지략도 아울러 갖추고 있었는데, 1390년에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박위는 위화도 회군과 공양왕 옹립까지는 이성계와 보조를 같이 하였으나 고려말 이성계의 전권에 대항하였다는 김종연 사건에 연루되어 풍주로
유배되었고, 1년여의 유배생활에서 풀려났으나 붕괴 직전의 고려조를 위해 구국충정을 가졌지만 정몽주마저 피살되는 대세를 막을 수 없어 이성계의
회유에 시기를 기다렸었다.
1392년에는 이태조가 등극하였고, 1393년에는 양광도절제사(揚廣道節制使)가 되었다. 이때 이성계의 명에 의해 두문동에 있는 고려조의 충신들을
찾아가기도 하였고, 고려 왕조의 회복을 위해 이흥무에게 미래에 대해 점을 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게
되었고, 장군의 덕망과 무인으로서의 기상과 재조(才操)를 잘 아는 이성계의 특별한 배례(配禮)로 무죄가 되어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로
보직되었지만 계속적인 대간(臺諫)들의 상소로 결국 파직되고 말았다.
이성계는 박위의 덕망과 무인(武人)으로서의 기상을 아껴 수감 중인 박위를 직접 가서 위로를 하였고, 사헌부의 연이은 탄핵에도 불구하고 옹호하여
무죄로 특사케 하였으나 결국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이방원의 추종세력에 의해 피살되었다. 범을 잡으려 범굴에 들어갔다가 범은 잡지 못하고 희생만
당한 격이 되고 말았으니 혼자의 힘으로 역사의 대세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리라.
조선참판 박기(吏曹參判 朴耆)는 조선초 문과에 급제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갔고, 후에 가의대부(嘉義大夫) 및 조선참판, 경연참찬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문학으로서 명성을 떨치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출생 연도와 별세일, 묘소 등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아마 선친인 박위 장군의 피살과 함께 그 후손들이 각지에 흩어지면서 유적을 보전하기가 어려운 시대 상황을 맞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밀양지(密陽誌), 밀양 향선생안(鄕先生案)등의 책에 단편적으로 실려 있고 조선초 이래의 저명한 인물이란 점이 기록된 사실만 전해질 뿐이다.
KBS 드라마『용의 눈물』에도 그 활약상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네 번째 잠수함을『박위함』으로 명명되기까지 한 박위 장군은
고려 공양왕 때 충의군에 봉해졌고, 위화도 회군의 공으로 정국군에 봉하여진 고려의 충신이자 우리 해군사(海軍史)에 길이 빛날 국가적 인물이었다.
조선 건국 후 불행히도 왕위 계승에 따른 골육상쟁의 와중에서 희생되어 비명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 후손들은 연고를 찾아 전국 각지로
흩어져 생활의 근거를 마련하였고, 임진왜란 후 사회질서가 회복되면서 친족 찾기에 노력한 결과 밀양, 충주, 대구, 영천, 창원 등지에 많이
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800년에 이르러서야 충의백 정국군 박위를 중조(中祖)로 하는 작업을 수개월 동안 논의한 끝에 정국군 파보를 작성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밀성박씨 정국군파(密城朴氏靖國君派)가 형성되었으니, 역사의 비정함과 함께 오랜 세월에 걸친 그 후손들의 고통이 어떠했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長劍一擧賊魂散(장검일거적혼산)
장검을 휘두르니 적의 혼이 흩어지고
憂國誠忠守古天(우국성충수고천)
우국의 참된 충성 옛나라를 지켰도다.
淸節偉勳靑史赫(청절위훈청사혁)
맑은 절개 큰 훈공이 역사에 찬란하니
將軍懿蹟億年傳(장군의적억년전) 장군의 빛난 사적 억만년을 전하리라.
우령산의 지맥이 서쪽으로 뻗어 정곡리와 무안리의 앞산을 이루고, 또 화악산의 지맥이 서남으로 뻗어 그 한줄기의 끝이 대불산을 이루고, 다시 뻗어 배산을 이루는데, 그 아래쪽에 형성된 마을이다.
익기소 : 정곡앞을 흐르는 정곡천에 소로 지금의 솥질 마을 앞 정자나무숲 부근이라고 한다. 옛날 이곳에 깊은 소가 있었는데, 기생이 빠져 죽은 소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하상이 높아 그 흔적만 남아 있다.
배산(舟山) : 정곡본동인 솥질 뒷산을 말함. 산세가 마치 배가 떠 있는 형국이라 햐여 붙인 산명이다. 이산의 바위를 깨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하여 돌을 깨지 못하게 하는 전설이 있다.
나뭇골(木洞) : 솥질 북쪽에 있는 마을로 적촌(赤村), 복을(伏乙)이라 하였다 한다. 마을 안쪽 골짜기에 나무가 많아 나뭇골이란 지명이 생겼다고 함.
신화 : 솥질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이 마을에 자주 화(禍)가 일어 났는대 이를 귀신의 조화라고 여겨 신화(神化)라고 했다가 지금의 신화(新化)로 고쳤다고 하며 이음이 변하여 시내라 부르기도 한다.
단장 : 신화 동쪽 산록에 위치한 마을이다. 옛날 이곳에 살았던 부자가 그 집주위에 큰 담장을 쌓았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인대 지금은 그 흔적만 있다.
조무실 : 신화의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뒷산의 산세가 마치 새가 춤추는 형국이라 하여 조무(鳥舞)실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정곡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청도방면 버스 이용
연상리
초동과 경계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서는 중리, 상당동, 양달이 있다.
상당동에는 조선시대 무신인 박곤장군의 추모제인 어변당이 있으며 마을 앞 연상들에 지석묘가 17개 산재되어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초동과 경계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마을로서는 중리, 상당동, 양달이 있다.
유물, 유적
어변당(漁變堂) :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90호로 지정되었으며 박병륜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조선 초기의 무신 어변당 박곤(朴坤)이 무예와 학문을 닦던 곳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건물의 건축 시기는 1440년 무렵이며 1814년 중수한 것으로 당시의 중수기가 편액에 기록되어 있다. 평면은 2칸의 대청과 온돌방 1칸을 두었으며 대청의 남쪽을 개방하여 측면 진입을 만들고 앞뒤로는 툇마루를 두었는데, 앞에만 계자각난간(鷄子脚欄干)을 둘렀다. 원기둥을 사용한 민도리집으로 3량 구조의 맞배지붕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현재는 주변이 정화되어 중앙에 충효사(忠孝祠), 오른쪽에 유물관, 왼쪽에 어변당이 있다.
어변당 앞에는 박곤이 만들었다는 연못인 적룡지(赤龍池)가 있다. 그는 이곳에 물고기를 길러 부모에게 효도를 하였는데, 물고기가 효성에 감동하여 비늘을 남긴 채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 어변당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변당(漁變堂)유래 : 조선시대 초기 밀양의 무안면 상당골에 박곤이라는 효자 양반이 살았다. 부모님을 잘 공양하려 해도 집이 너무 가난하여 고기를 사드릴 수 없게 되자 서당의 조그만 못에 고기를 길러 부모를 공양하였다.
자기가 먹는 밥에서 한두 숟가락을 남겨 가지고 고기에서 그것을 주었는데, 붉은 고기가 제일 먼저 먹고 나머지 음식을 그 밖의 고기가 받아먹는 것이었다.
수년 동안 그렇게 고기에게 음식을 먹였는데 하루는 꿈에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서는"공이 부모에게 효도하는정성이 지극하고 또한 수년간 우리를 키워주신 은덕을 저희들이 입었는데, 이제 저희들이 다른 곳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그 은혜로 장니(障泥) 두 개를 드릴 테니 공이 혹 긴히 필요할 때 쓰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고, 또 "내일 천둥과 벼락이 치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하는 것이었다. 깨어보니 꿈이었다.
이튿날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치고 못이 부글부글 끊으면서 갑자기 알 수 없는 무엇이 공중으로 휙 날아가 버렸다. 더 조금 지나서 날이 전처럼 개이자, 박곤은 못에 가보았는데 못에는 용이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또 희한한 일은 장니가 두 개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후 박곤은 무과에 급제하여 최윤덕 장군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때 남쪽에서 왜구가 출몰하여 평정하여 평정하러 가는 차에 붉은 옷을 입은 노인의 말도 있고 해서 장니를 가지고 갔다.
그런데 적과 싸우는데 적의 조총 탄환이 하나도 그에게 상처를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박곤은 스스로 신기해하며 종횡 무진으로 적을 치고 크게 공을 세웠다. 그후 여진정벌과 전국의 무너진 성을 개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관찰사와 호조참판 등을 지내게 되었다.
또 세종 때에는 명나라에 황제의 즉위 인사차 갔는데, 거기에서도 여러 번 공을 세워 중국 황제가 상으로 미인을 그에게 주었는데 그 미인과 사이에 아이를 셋 두었는데 황제의 사성인 표씨를 따라 첫째 아이는 일걸, 둘째는 이걸, 셋째는 삼걸이라 하였다. 그 후순들이 아직도 산동성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 후 귀국한 박곤 장군은 조정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살았는데,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로 고기에게 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박곤이 살던 집을 어변당(魚變堂)이라고 한다.
어변당 고문서
1. 부산포진해유문서 [釜山浦鎭解由文書] :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08호로 지정되었으며 통도사가 소유, 박병륜이 관리하고 있다. 어변당 박곤(朴坤)의 후손인 박기우(朴起羽)가 1887년(고종 24) 부산포진에 첨절제사로 있다가 전임할 때의 해유문서이다. 한지로 되어 있으며 가로 53㎝, 세로 5㎝이다.
전임자가 해임되어 다음 임명자와 교체하고 소관 업무의 책임을 넘겨줄 때 신임관에게 넘겨주는 증빙서류이다. 조선시대에는 지방기관 관원이 물품수납 지출 등에 관한 장부를 신임관원에게 넘겨줄 때 이를 호조(戶曹)에 보고하고, 호조는 사실을 조사하여 문제가 없을 경우 조선(吏曹)에 통지하여 그 책임을 해제시켰다.
내용은 당시 부산포진의 공해와 시설, 병선(兵船)ㆍ병기(兵器)의 종류와 수량, 군대의 편성과 군사의 수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박기우는 1887년 윤 4월 7일 제수되어 같은해 10월 8일 부임하였고 12월 교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행부사(行府使), 행좌수사를 거쳐 좌랑과 정랑, 참의의 결재가 되어 있다.
2. 안동진영상중기(安東鎭營上重記) : 고종 24년(1887년) 9월에 한지에 작성된 문서로 가로 27㎝, 세로 33.5㎝이며, 당시 영남지방의 안동도호부 관할지역인 안동, 순흥, 비안, 영천, 의성, 예천 등 15개 군과 현의 군기(軍器) 관계 목록, 수량 등을 기록한 국방상의 기밀문서이다.
3. 민장초개(民狀抄개) : 고종 23년(1886년) 7월 22일부터 다음해 12월 31일까지 1년 5개월 동안 박기우(朴起羽)가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 재임하면서 관내에서 발생한 민원(民願)을 접수한 순서대로 기록하여 처결한 공무일지(公務日誌)로서 사료(史料)적 가치가 높은데,
주로 재산(財産)분쟁과 침탈(侵奪)사건, 불륜(不倫)사건, 관리들의 부정과 횡포 및 양반들의 불의(不義)등을 고발하고 정상(情狀)을 하소연한 것이 대부분이다. 제4책의 끝부분에는 박기우에 대한 안동 선비들의 전별시집(餞別詩集)과 누정기(樓亭記), 제문 등이 실려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우령산의 지맥이 서남으로 뻗어 납달고개로 해서 함박산에 이르고, 납달고개의 위쪽에서 한 줄기가 뻗어 청도천에 이른다. 이산 능선을 사이에 두고 부로리와 경계를 이루며 형성된 마을이다.
상당동 : 상당곡이라고도 하는대 약 450년전 박곤장군이 이곳에 어변당을 짓고 집뜰에 못을 깊게 파서 고기를 길렀는데 그 고기가 용이 되어 상천하였다고 해서 상천의 상자와 어변당의 당을 따서 상당동이 되었다고 한다. 상당동은 그 위치에 따라 음달마와 양달마로 나뉜다.
납달고개 : 연상에서 초동면 봉황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무안면과 초동면의 경계이다. 이곳에 납달바위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대 이 바위가 바로 지석묘이며 현존한다.
중리 : 이 마을 서북쪽 골짜기에 하곡동이 있었고 위쪽은 상당동이 있어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을 중리라 한다. 또한 호연정이 있었다고 하여 호연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연상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경유 버스 이용(무안에서 하차 연상까지 보도 10분 거리)
고사리
옛 지명은 고사을지 또는 고사동리라고 불렀는데 옛날 이 마을 뒷산에 인격이 고결한 선비가 살았다고 하여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고사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사동 동남편 산정상에 있는 바위로 바위의 모습이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애기 바우가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옛 지명은 고사을지 또는 고사동리라고 불렀는데 옛날 이 마을 뒷산에 인격이 고결한 선비가 살았다고 하여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고사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고슬곡 : 고사동에서 부연으로 가는 고개이름으로 고사동고개라는 말이 줄어진 것으로 보인다.
애기바위 : 고사동 동남편 산정상에 있는 바위로 바위의 모습이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절골 : 고사동 마을에 있는 가매봉산의 절터가 있었던 지역으로 이 일대를 안수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고사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창녕방면 버스 이용
강동리
청도천 옆에 형성된 마을로써 강의 동쪽이라 강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부연과 서은동이 있다. 여름철 청도천이 범람하는 수해 상습침수지역이나 많이 개선되고 있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옛 지명은 고사을지 또는 고사동리라고 불렀는데 옛날 이 마을 뒷산에 인격이 고결한 선비가 살았다고 하여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고사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서로는 도리산이 서남으로 뻗어 내려와 종암산을 이루면서 인교에 이르고, 동으로는 우령산의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 함박산에 이르는데, 그 사이로 청도천이 흐르고 있다. 이 청도천 옆에 형성된 마을이다./li>
부연 : 청도천의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주위의 산세가 가마솥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부연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어룡산 : 부연동 마을 뒷산 동남쪽 일대의 산을 위의 모습이 아기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서은동 : 청도천의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서쪽에 숨겨진 지명이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강동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창녕방면 버스 이용
강서리
청도천 옆에 형성된 마을로써 강의 서쪽이라 강서로 불렀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개미와 성덕원,인교가 있는데 인교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창녕군 부곡리와 초동면의 경계에 위치한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인 교 : 구한말 때 이곳이 활빈당의 거점이 되어 말술(斗酒)을 받아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술과 밥을 먹여 주기도 하고 때로는 돈까지 나눠줬다고 한다. 그래서 관군이 이들을 체포하려 해도 이곳에 있었던 솟대안에 숨거나 인근 주민의 비협조로 소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산 지이다리 도둑 끊듯 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서로는 도리산이 서남으로 뻗어 내려와 종암산을 이루면서 인교에 이르고, 동으로는 우령산의 줄기가 서남으로 뻗어 함박산에 이르는데, 그 사이로 청도천이 흐르고 있다. 이 청도천 옆에 형성된 마을이다.
성덕원 : 조선시대 성덕원의 원사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원은 수안역과 창녕군 온정역 중간에 위치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밀주지(17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이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개미 : 성덕원 북편에 위치한 마을로 옛 지명은 포산 또는 개뫼라고 하였다.
인교 : 밀양시와 창녕군의 경계지점으로 북으로는 성덕리 동으로는 초동면 서로는 창녕군과 인접해 있는 교통요로다. 지금도 구도로를 중심으로 창녕군과 밀양시로 나눠져 있다.
안골 : 성덕원 마을 뒷산 골짜기를 말하는데 마을 안쪽에 있는 골짜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을 통해 부곡면 수다리로 넘어가는 땅고개가 있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강서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창녕방면 버스 이용
모로리
옛지명은 모로곡이라고 하고, 노인을 공경하는 예의 바른 곳이란 의미에서 모로리라 했다고 함. 임진왜란때 마을앞에 큰 숲이 있었기 때문에 왜군이 이앞을 지나면서 마을이 있는줄 모르고 지났다고 해서 모러리라 하였다가 모로리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지금의 창고 자리에 상서이동면의 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소개
마을약사(전설)
인 교 : 구한말 때 이곳이 활빈당의 거점이 되어 말술(斗酒)을 받아 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술과 밥을 먹여 주기도 하고 때로는 돈까지 나눠줬다고 한다. 그래서 관군이 이들을 체포하려 해도 이곳에 있었던 솟대안에 숨거나 인근 주민의 비협조로 소탕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금도 "영산 지이다리 도둑 끊듯 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옛지명은 모로곡이라고 하고, 노인을 공경하는 예의 바른 곳이란 의미에서 모로리라 했다고 함. 임진왜란때 마을앞에 큰 숲이 있었기 때문에 왜군이 이앞을 지나면서 마을이 있는줄 모르고 지났다고 해서 모르리라 하였다가 모로리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덕암산의 지맥이 동으로 뻗어 청도천에 이르고, 그 지맥을 뒷산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골안 : 마을 뒷산의 골짜기를 말하는데, 골짜기의 안쪽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원원들 : 동네앞 큰 들로 땅이 비옥하고 면적이 무안면에서는 제일 크다. 원래부터 생겼던 들이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구마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모로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창녕방면 버스 이용
덕암리
덕암이란 명칭은 이마을의 덕암산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 이라고도 하고, 또 이마을 앞 고래들 중앙남단에 있는 큰 바위를 德바위라고 칭한데서 유래 되었다고도 한다.
사찰이 많은 동네이다.(무인사,극락사,불세암등) 자연마을으로 중촌,음달,양달,상촌,하촌,신숲,옥천동,산뱅이등이 있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도리산이 동쪽으로 뻗어 내려와 덕암산을 이루고 덕암산 아래족에 위치한 마을이 덕암리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숲,옥천동,중산리의 일부를 합쳐 덕암리라 하였다.
중촌 : 마을의 중앙에 위치한 보 마을이다.
상촌 : 중촌 마을 위에 있는 마을이다.
덕암산 : 도리산의 지맥으로서 아래쪽에서는 제일 큰산이며 덕암리의 주산(主山)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덕대산이라 하기도 한다.
산뱅이 : 덕암리의 제일 위쪽(산중턱)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 뒤의 세 봉우리의 형세가 두꺼비,뱀,돼지의 형상이라 하여 삼봉이라 했는데 이 명칭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옥천동 : 중촌의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마을앞에 옥같이 맑은 샘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신숲 : 옛날 이곳에 자연적으로 생긴 숲이 있어 경치가 좋을 뿐만 아니라 피서지로 이용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구마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덕암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면 서가정 방면 버스 이용
버스시간표
중산리
마을 뒷산인 중봉 아래쪽에 있다고 하여 중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평산 신씨의 집성촌이다. 자연마을로는 중산, 학교앞, 새터(험신골, 새마)가 있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도리산에서 덕암산에 이르는 산줄기가 창녕군과 밀양군의 경계를 이루고 이 지맥에서 뻗은 여러 산줄기가 내려와 고라리와 가례리의 경계를 이루는 중봉이 되었는대, 이를 배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중산 : 본마을로 뒷산인 중봉아래 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평산 신씨의 집성촌이다.
삼강동 : 중산리부터 그 안쪽에 있는 마을 전체를 일컬어 삼강동이라 부른다. 이는 임진왜란때 서가정 출신의 손인갑과 그의 아들인 손약해, 그리고 노개방과 그의 부인 여주 이씨, 고라리 출신의 사명당 등 이곳에서 충신,효자,정절녀가 5위나 배출되어 삼강(三綱)을 빛낸곳이라고 붙여진 지명이다.
덕암산 : 도리산의 지맥으로서 아래쪽에서는 제일 큰산이며 덕암리의 주산(主山)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덕대산이라 하기도 한다.
충절길 : 중산초등학교에서 무안리로 가는 길을 칭하는대 중산리 입구의 산기슭에 있는 바위에 삼강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다.
새터 : 중산 본마을 동편 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로 부르기도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구마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중산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면 서가정 방면 버스 이용
웅동리
웅동리에서 가장먼저 생긴 마을을 곰골이라 하는데 이를 한자음으로 표기하면서 웅동으로 바뀐 것이라 하며 마을형상이 곰이 누워있는 형상이며 이 산의 숲이 곰의 턱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이라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관동, 야촌, 곰골, 자양동, 어룡동이 있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도리산의 지맥이 동으로 뻗어 종암산에 이르고, 그 아래 중산리와 인접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동으로는 중산리, 서로는 창녕군, 남으로는 덕암리, 북으로는 가례리와 각각 인접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자양동, 어룡동,관동을 합쳐 웅동리라 하였다.
관동 : 웅동리로 들어가는 첫마을로 옛지명은 관동리였다. 뒷산에 있는 구표충사의 앞산 모습이 고깔을 쓴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지쪽의 양달마와 음지쪽의 음달마로 나뉘어져 있다.
들마을 : 웅동리 본담인 곰골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약 150년전에 들가운데 생긴 마을이라 하여 들마을, 야촌이라고도 부른다.
자양동 : 웅동리 본담인 곰골의 위쪽에 위치한 마을로 임진왜란 전부터 이 곳에 자양사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룡동(魚龍洞) : 자양동의 안쪽에 있는 마을로 옛지명은 어룡동리였다. 웅동 저수지 부근의 산세가 왕을 상징하는 용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여 어룡동으로 부른다고 하며 일설에는 앞 냇가의 작은 못에 살던 물고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구마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웅동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면 서가정 방면 버스 이용
서가정
무안면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이 곳에서 삼현이 나왔다고 하여 西哥亭, 西佳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행정리동이 서가정이고 법정리명은 가례리이다.
마을소개
유물, 유적
영산 정사
특 색 : 부처님 진신사리 백만과 및 불교경전을 다수 소장한 성보박물관이 영산정사 경내에 있음.
견학안내 : 무안 소재지에서 중산방면으로 진입하여 서가정리 뒷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연중 견학이 가능함.
오시는 길 : 밀양시 방면에서는 무안 소재지를 거쳐 중산마을을 경유하여 고라리에 중촌 마을로 오시면 되고 인교방면에서는 무안소재지 입구 문화마을에서 좌 회전하여 중산마을 경유하여 서거정 영산정사로 오시면 됨.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청도면 조천리의 뒷산인 지불등이 남으로 뻗어 도리산에 이르고 다시 도리산의 한줄기가 동으로 뻗어 중봉산에 이른다. 마을 뒤로는 고라리에 이르고 한 줄기가 내려와 서가정에 이른다. 북,서,남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도리산 : 천왕산의 지맥이 남을 뻗어 형성된 산으로 서가정의 뒷산일 뿐만아니라 무안면 동부의 주산이 우령산이라면 서부의 주산은 도리산이 된다고 한다.
불당골 : 서가정 마을 서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 절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최근 사찰이 새로이 들어 섰다.
바람재 : 서가정 마을에서 창녕군 옥천리, 시무실, 놋단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구마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서가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면 서가정 방면 버스 이용
버스시간표
기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100만과 모시고 각종 불교관련 자료가 있는 불교박물관이 동네 뒤편에 있다.
다례리
가례리 다례마을로써 못안, 새터, 아치실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으며 특히 개울가에 꿩이 많이 서식하였다고 하여 생긴 마을인 아치실이 있다. 행정리동이 다례리이고 법정리명은 가례리이다.
마을소개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다례저수지 위쪽에 위치한 마을로 원래 이곳을 다례동이라 하였는대 개칭하여 감리로 불렀다가 이웃마을 서가정에서 삼현이 나왔다고 해서 다시 다례동(多禮洞)이라 불렀다 한다.
청도면 조천리의 뒷산인 지불등이 남으로 뻗어 도리산에 이르고 다시 도리산의 한줄기가 동으로 뻗어 중봉산에 이른다. 마을 뒤로는 고라리에 이르고 한 줄기가 내려와 서가정에 이른다. 북,서,남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도리산 : 천왕산의 지맥이 남을 뻗어 형성된 산으로 서가정의 뒷산일 뿐만아니라 무안면 동부의 주산이 우령산이라면 서부의 주산은 도리산이 된다고 한다.
불당골 : 서가정 마을 서쪽에 위치한 골짜기로 , 절터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도 절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최근 사찰이 새로이 들어 섰다.
바람재 : 서가정 마을에서 창녕군 옥천리, 시무실, 놋단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바람이 세차게 분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찾아오시는 길
자가운전
중부내륙고속도로 → 창녕군 영산 IC → 부곡면 → 무안면 다례리
대중교통
밀양버스터미널 → 무안면 서가정 방면 버스 이용
고라리
옛 지명도 고라리였다.옛부터 냇가에 느티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괴나리, 과나루등으로 불렸으며 마을 뒷편에 사명대사 생가유적지가 있는데 현재 복원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자연마을로는 장재기,중촌,마곡이 있다.
마을소개
유물, 유적
사명대사 생가지 : 임진왜란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생가지가 중촌마을에 있으며 현재 복원공사가 진행중이다.
풍수지리 및 주요 지명
동,북,서 삼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으로 트여 있는 마을이다. 그 가운데에 여러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고라천을 이루어 청도천으로 흘러간다.
진동고개 : 중촌 마을에서 화봉리와 삼태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이다.
마곡 : 중촌 위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이곳에 삼(麻)이 많이 자생하여 숲을 이루었다고 마곡이라 부른다 한다.
장재터 : 고라리의 입구에 위치한 마을로 장재기라고도 하는데 300여 년전 이곳에 장자가 살았다고 붙여진 지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