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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인물

  • 조선말엽 무안면 무안리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많은 고생을 겪으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약간의 자본을 마련하여 포목상을 차렸다. 그는 성실하고 신의가 있어 장사가 번창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이웃을 돕고 고장을 위하여 필요한 일이면 아낌 없이 쓸 줄 아는 독지가가 되었다. 어느해 흉년이 들어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릴 때 사재를 털어 곡식을 마련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면내의 연례행사인 줄다리기 등의 민속행사에도 행사비를 희사하였다. 그의 평소 생활태도는 자립·신의·성실이었다. 1967년 62세를 일기로 별세하게 되자 무안면 주민들은 그의 착한 정신을 기리고자 무안리 길옆에 "진주 강공 순조 진휼비(晋州姜公順祚賑恤碑)"를 세워 후세 사람들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 나이 12살에 어머니를 따라 가서 산밭을 매다가 날이 저물었는데, 어머니가 범에게 물려가게 되자, 금지가 한손으로 어머니를 붙잡고 한손으로는 호미를 쥐고 범을 때리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와서 구해 달라고 외쳤으나, 백여보쯤 가서 붙잡고 있는 어머니가 점점 굳어지니 범이 버리고 가버렸다. 시체를 거두어 그의 집에 안치하고, 밤 새워 시체를 안고 통곡하고, 옷을 팔아 관을 사서 장사지냈다. 이 일이 임금에게 들리어 정려하였다.
  • 조선 고종 29년 1월 5일 밀양시 부북면 청운리에서 김병엽(金炳曄)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성품이 어질고 재지가 총명하였으며 나이 15세에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동에 사는 성암(醒菴) 박문하(朴文夏)의 손자 박지훈(朴志熏)과 결혼하여 1907년 11월 27일에 시가로 갔다. 어린 신부의 눈에 비친 시가은 너무나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어린 신부는 시가의 가산을 일으켜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옷끈을 졸라매어 절약하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길쌈하여 몇년간 푼푼이 모은 돈으로 시증조부때 가졌던 논 365평을 170원에 사서 살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끊임없는 노력은 어느듯 2만여평의 재산으로 불어났다. 1559년 폭우로 마을 뒤 제방이 유실되고 교량이 파괴 되었을때 11년간 피나는 노력으로 저축해 두었던 쌀 17섬 5말을 팔아 제방과 교량을 복구하니 마을 사람 모두가 놀라운 일이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1940년 11월 13일 기와집 4동을 짓고 1942년에 농우(農牛) 한마리를 15년간 길러 그 번식이 53마리로 늘어나 상당한 재산이 되었다. 이것을 모두 정리하여 시조부 성암(醒菴) 박문하(朴文夏)의 재실 6간을 건립하고 1971년 5월 5일 고을에 청하여 모성재(慕醒齎)라 편액하였다. 평소 시부모와 남편을 공경하며 일가친척들 간에도 화목하게 지냈으며 자녀들에게는 법도 있는 교육을 엄하게 하고 이웃간에는 다정다감 하였다. 평생을 통하여 구경하러 나들이 한번 해본적이 없고 오직 가사에만 몰두하며 근면과 절약, 신의와 성실로 자수성가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다. 1978년 2월 6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하시니 그의 거룩한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인근 마을 사람들과 유족들이 주선하여 1980년 2월에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화동에 김씨부인 기적비(金氏夫人紀蹟碑)를 세워 그를 추모하였다.
  • 조선시대에 김상우라는 소년이 살고 있었다. 일찌기 어머니를 여읜 소년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 지극 하기를 말할 수 없었다. 부친께 고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고 부친보다 먼저 음식을 드는 일이 없었으며, 외출에서 돌아오신 부친의 발은 항상 씻겨 드렸는가 하면 아무리 땀에 절은 부친의 옷이라도 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친께서 병들어 눕게 되었다. 어디가 어떻게 편찮은 지도 잘 모르는 가운데 부친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져만 갔다. 그동안 근처의 의원이 왕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확실한 병명은 몰랐다. 약도 수없이 구해 드렸으나 헛일 이었다. 마침내 부친은 아무 음식도 입에 대지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 유명한 의원이 소년의 효성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 진맥을 하곤 매우 난처한 얼굴로 이 병엔 메기를 구해 먹여야 하는데 이런 엄동설한에 어디서 메기를 구할까 하고 한탄을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소년은 앉아서 부친의 죽음을 지킬 순 없어 낚싯대를 메고 낙동강 꽁꽁 언 강바닥을 돌로 쪼아 낚시를 드리워 얼마 동안 인지도 모르게 낚시대에만 정신을 모아 앉아 있었다. 이때 하늘의 도움인지 낚시대가 출렁하는게 아닌가. 소년은 힘껏 채어 당겨 보니 수염이 기다란 큰 메기 한마리가 낚시에 걸려 입을 벙긋 거리고 있었다. 소년은 한달음에 집으로 가 고아 부친께 드렸더니 의원의 말대로 부친의 병은 완쾌되었다 한다. 또 일설에 의하면 부친이 노후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는데 어느 의원이 삼을 먹어야 낳는다는 말을 듣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며칠을 산속에서 헤메이다 지쳐 쓰러지게 되었는데 비몽사몽 간에 백발노인이 나타나 어서 기운을 차리고 이것을 받아라. 바로 네가 찾는 산삼이니라 함에 놀라 벌떡 일어나니 커다란 산삼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김상우가 그 산삼을 달려 드려 부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도 한다
  • 1920년 8월 2일 밀양시 상동(上東)에서 태어났다. 재질이 총명,영리하여 학업이 우수하고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여 매사에 공명하니 어린시절부터 부모의 총망이 대단하였다. 대구사범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에 정진하다가, 같은 학우인 임굉(林宏)의 주동으로 이태길(李泰吉), 최낙철(崔洛哲)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엇인가 힘이 되어야 하겠다고 의논하고 대구부 동운정(東雲町) 350번지 이무영(李茂榮)집에서 비밀결사인「연구회(硏究會)」를 조직하고 김영복은 이과부(理科部) 책임 및 연구회의 사무원이 되어 동지들을 포섭하고 시국의 추이와 항일정신의 고취를 위해 연구회의 비밀집회를 자주 동운정 집에서 가졌다. 졸업 후에도 청소년을 어떻게 교육하여서 조국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그의 방안 등을 연구하는 등 1941년 2월 1일 부터 동년 3월까지 6회에 걸쳐 비밀회합을 하였다. 1941년 4월 1일 충남 예산군 신암국민학교(禮山郡 新岩國民學校)에 부임하게 되었다. 연구회에서 결의를 가졌던 뜻을 일관하고자 학생과 학부형들에게 은근한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다가 언행의 수상함을 경찰이 감지하고 1941년 7월에 김영복을 예산경찰서 형사대가 체포하여 대전형무소에 수감시켰는데 1년 8개월만인 1943년 2월 8일 예심종결을 지어 대전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됐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2년 6월 징역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2월 6일 만기 출옥하였다.(대전지법 예심종결서) 조국광복 후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 받았다.
  • 1431년(세종13)~1492년(성종23), 조선 세종때의 성리학자. 자는 계온 또는 효관. 호는 점필재. 벼슬은 형조판서를 지냈으며 본관은 선산. 시호는 문간, 문충. 밀양출신. 조선 세종 13년 6월 경자일 갑자시에 밀양부의 서쪽 대동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부북면 제대리 추원재가 선생의 생가인데 그 뒤에 재사로 개조 중건한 것이다. 사예 김숙자 선생의 43세때 3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나실 때 마을앞 냇물이 역류하고, 물맛이 달콤하게 변하여 감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1489년(성종20) 59세 때 자헌대부 형조판서 겸 지경연 홍문관제학 성균관사를 공정하게 처결하니 조정이 감복하였다. 가을에 병으로 사임코자하니 지중추부사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성종의 은총이 심히 두터우니 시기하는 무리들이 많은지라 동래 온천에 목욕간다는 허락을 얻어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왔다. 임금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녹을 받으라 하였으나 재삼 사양하였다. 1520년(중종15) 원래 선생의 문집 초본이 20여군인데 연산군이 모두 불태우게 하였으나 이웃사람들이 불길 속에서 1~2권을 끄집어 낸것을 선생의 조카 강중진이 보관하고 있다가 무오사화가 지난 22년만인 이해에 여러 읍의 수령들이 모의하여 비로소 출판하게 되었다. 선생의 저서로는 총재관으로 동국여지승람 55권을 증수한데 이어 많은 시집과 점필재집, 이존록, 유두유록, 청구풍하, 오경석의, 동문수, 일선지, 당후일기, 경사도지, 선산지도 등이 있다. 선생이 살던 고향과 도학을 강론하던 곳에 사당을 세우고 봄, 가을로 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예조에서 보고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사, 금산 경렴서원, 밀양 예림서원, 선산 금오서원, 함양 백연서원, 개령 덕림서원에 제향을 올리게 되었다. 그 뒤에 창건된 것으로 화순 해망서원, 고창 운곡서원에서도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1866년(고종3) 가곡 도연재를 창건하였다. 선생을 위하여 향토(고령군)유림에서 계를 만들어 지은 것이다. 세상에 전해오기를 한훤당, 일두는 이학을 얻고, 매계, 탁영은 문장을 얻었으며, 허암 정희량은 수학을 얻고 이종준은 의서를 다하고, 박문은 시학을 얻고, 남효온, 홍유손은 처사의 흐름을 배웠으니 우리 동방에 300년간 심어 끼쳐온 공은 모두 선생으로 비롯하였다 한다.
  • 청도김씨의 시조. 벼슬은 태부중서시랑평장사. 시호는 영헌(英憲). 고려 명종 20년에 청도군 하남면 대성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풍채가 특출하고 총명하기 신과 같아 사람마다 칭찬이 자자했다. 시서와 6예의 글을 통하여 훌륭한 인격을 엿보였다. 고려 고종 5년(1218)에 거란병이 쳐들어왔다. 그 당시는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의무적으로 종군하게 되어있어 김지대는 아버지가 징병하게 됨을 보고 나이 많은 부모님을 대신하여 입대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종군하게 되었다. 종군할 때 모든 군사들은 무서운 짐승의 모양을 그려 방패를 만들어서 과시하는데 오직 김지대만은 방패 머리에 1절의 시를 지어 방패를 만들었다. (國患臣之患親憂子所憂代親如報國忠孝司雙修) "나라의 걱정은 신하의 걱정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아들의 근심이라.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보답함은, 충과 효의 두가지를 닦음이라." 하였다. 그때 원수 문정공 조충이 군사를 점검하다가 그의 시를 보고 기특히 여겨 중요한 보직을 주어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게 하였다. 이듬해에 강동에서 거란족을 크게 무찌르고 나라는 평정을 보게 되었다. 그 뒤 벼슬길에 올라 여러 벼슬을 지내면서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몸을 바쳤으며, 나라에는 충성이요 부모에게는 효도하는 정신을 온 백성들에게 몸소 보였다. 선생이 판사재시사(혹은 판사재감사)로 있을 때 몽고병이 북변을 침범하여 서북의 여러 성을 잃었다.병마사 홍회가 주색에 빠져 군무를 돌보지 아니한 결과였다. 임금께서는 홍회를 대신하여 출진케 하니 이에 서북 40여 성이 안정되었다. 임금께서는 공을 표하여 오산군을 봉하고 태부중서시랑 평장사를 배하였다. 이 분이 청도 김씨 시조이며 묘소는 경북 청도군에 있다. 고려때의 경북청도는 밀양군의 땅이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밀양군 청도면 두곡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다. 그의 시호는 영헌(英憲)인데, 덕(德)이 바르고 화(和)에 응(應)함을 영(英)이라 이르고, 행실이 착하여 기강(紀綱)이 됨을 헌(憲)이라 이른다. 후손들이 사는 청도면 두곡리에 그의 위패를 모시는 쌍수당(雙修堂)이 있으며, 쌍수당은 충성과 효도 두가지를 닦은 뜻이라 한다.
  • 자는 여실(汝實). 본관은 광주. 벼슬은 병사(兵使)를 지냈으며 시호는 양무(襄武). 임진왜란에 창의한 무신. 타고난 천성이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여 기질과 도량이 넓고 원대하였으며 학문에 힘쓰는 한편 무술도 배워 문무를 겸비한 큰 인물로 추앙을 받았다. 1580년(선조 13) 26세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만호(萬戶)로서 한가로히 집에 있다가 도내의 여러 지사들고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자는 운동에 앞장섰다. 울산지방에서 부터 항전을 시작하였는데 당시의 경상도 관찰사 유성용(柳成龍)이 "나라의 큰 일을 맡길만한 인물"이라 하였다. 전란중의 행정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군민들이 공을 임시 울산군수로 삼았는데, 공은 각처를 왕래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니 3,000여명이 그의 군문에 호응하였다. 같은해 10월에 적병 300여명을 태운 선박 6척이 기장방면에서 울산으로 진군해 오니 공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적의 머리 30여급(1급은 20명)을 베고 적선 2척을 완전히 격파 하였다. 이 전공으로 조정에서는 봉정대부 군기시정(奉正大軍軍器侍正)에 임명하고 정식으로 울산군수에 보직하였다. 1593년(선조 26) 4월에 적의 대군이 밀려오니 작전상 군대를 경주로 이동시키고 이견대(利見臺) 바다와 봉길리(鳳吉里)에서 싸워 크게 이겼다. 계속되는 전란과 그의 무훈으로, 1594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1600년 우 병사(右兵使), 1602년 부산영장(釜山營將)과 좌병사(左兵使)를 겸직, 1603년 7월에 대학(大學) 1부를 하사 받았으며 1604년 9월에 본도 방어사로 임명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원종공신 1등(原從功臣一等)으로 책정되고 그 해 겨울에 자헌대부 5위도총부 도총관(資憲大夫五衛都總府都總管)에 승진되었다. 1606년 5월에 우병사(右兵使)로 진주에 재임되니 성첩을 수선하고 망루와 파수를 엄중히 하여 군기를 확립하였다. 1609년(광해 3)에 다시 방어사·도총관에 임명 되었으며 1613년 에 박응서(朴應犀)의 무고로 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임명 되었으나 사직하고 돌아왔다. 1620년(광해 12) 3월 15일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박연정(博淵亭)에서 세상을 떠나니 선생의 나이 66세였다.
  • 정병(正兵) 김순강(金順江)의 아내였는데, 뒤에 버림을 받아, 그 부모가 개가 시키려하자, 난비가 이르기를, "한 몸으로 두 남편을 섬기는 일은 죽더라도 감히 하지 못하겠습니다."하고 곧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1492년(성종 18)에 정려하였다.
  • 자는 유한(維翰). 조선 명종 18년 밀양시 무안면 가례리 서가정에서 풍천 노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이 겨우 10세에 글이 능하여 그의 선배들을 소추(所推)하였으며 맡은 일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지켜 나갔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 하였으며, 그 뒤 동래 교수(東來敎授)로 있었는데 임진년 봄에는 집에 쉬러 와 있었다. 왜병이 상륙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동래로 달려가서 받들던 성현의 위판을 안고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과 같이 전사 하였다. 싸움터로 나가면서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대문을 나올때 부인이 따라 나오며 "지금 위급한 전쟁터로 떠나시면 언제 돌아오실지 또한 살아계신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찌 하여야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동쪽 하늘에 붉은 구름이 피어 오르거든 내가 죽은 줄 알라." 하고 떠났다 한다. 그 뒤 그의 부인이 매일 절터의 벼랑끝에 서서 남편의 생사를 지켜보던 중 하루는 동쪽 하늘에서 갑자기 붉은 구름이 피어 오르자 남편이 전사하신 것을 알고 그 벼랑에서 몸을 던져 남편의 뒤를 따랐다 한다. 다른 말로는 노개방이 동래부사 송상현과 같이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그의 부인 이씨는 남편의 혼패(魂牌)를 안고 엄광산에서 자결하여 남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 뒤 나라에서는 이 갸륵한 충, 효, 열을 기리기 위하여 이문 현판(里門懸板)을 내려주었는데 이 현판을 단 이문(里門)이 서가정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시대는 명확히 모르나 수백년은 되었음을 마을 노인들이 증언한다. 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충신절사 증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행동래교수 노개방" "증 숙부인 열부 여주이씨지여". 삼강동(三綱洞)이란 마을의 별칭은 이문(里門)을 세운 뒤에 생겼다 한다. 전라도 가평에는 노개방 서원이 있다고 하며 혈손이 없고 양자손(養子孫)이 살고 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도승지(贈都承旨)를 추증하였고 중봉사(中峰祠) 및 동래 정충사(程忠祠)에서 제향을 받든다.
  • 민씨부인은 밀양시 하남읍 파서리 여흥(驪興) 5우선생의 5형제중 삼매당(三梅堂) 구서(九敍)의 딸로 태어났다. 장성하여서는 밀양시 상동면 가곡동에 사는 밀성(密城)사람 박희량(朴希良)에게 시집와서 탁월한 총명과 여자가 지켜야할 모든 분야에 막힘이 없어 한가문의 꽃으로 시댁 어른들에게 효행이 타의 모범이 되었고 행실은 전체 문중의 귀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들이 물밀듯 닥쳐오자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집뒤 바위 절벽에 올라 투신 자살 하였다. 이 민씨부인 무덤은 낙화암(落花岩)밑에 있고, 부인이 몸을 던진 바위를 지금도 낙화암이라 부르고 있다. 박씨 문중에서 세운 정려각(旌閭閣)이 있다.
  • 조선 성종·명종 초기 효행과 우애로 이름 높은 민구령(閔九齡)·구소(九韶)·구연(九淵)·구주(九疇)·구서(九敍) 5형제이다. 이 다섯 형제는 모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의 문인으로 한훤당 김굉필(金宏弼), 일두 정여창(鄭汝昌), 매계 조위(曺偉), 탁영 김일손(金馹孫) 등 당대의 명유들과 더불어 도의로 교유 하였다. 다섯 형제는 지극한 효성으로 아버님께서 심한 토사증상으로 빈사상태일때 5형제가 일제히 손가락을 끊어 수혈로 회생한 일이 있으며, 어머님께서 종기로 오래 고생하게 되자 5형제가 번갈아 농집을 빨아내어 완치하게 되었다.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여 아버지께서 각기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하자 "옛날 군자는 8대를 같이 살아도 화목하게 지낸 일도 있는데 어찌 형제가 각각 재산을 나누어 떨어져 살며, 내것 네것을 가려라 하십니까?" 하며 끝내 재산을 나누어 가지지 않고 평생을 서로 양보하고 절약근검하며 지냈다. 1490년(성종 20) 삼랑강 기슭 삼랑루(三浪樓) 옛터에 정자를 지어 오우정(五友亭)이라 편액하고 5형제가 동침하고 한밥상에서 같이 먹었다. 1563년(명종 18)에 고을 사람들이 이들의 우애를 기리기 위하여 오우사(五友祠)와 기사비(記事碑)를 건립하고 봄·가을에 제향을 받들었다. 1592년 임란때 문물이 모두 불타 없어졌으나 1675년(숙종 원년) 오우정이 중건되고 임진하(任震夏)가 상량문을 지었고, 1697년(숙종 23) 오우사(五友祠) 중건 기초를 착공하였다. 1702년(숙종 28)에 향토 사림의 공의로 삼강서원(三江書院)에 입향하였고 1704(숙종 30)에 오우사 묘우(廟宇)를 중건하여 상량문(上樑文)은 신몽삼(辛夢三)이, 봉안문(奉安文)은 이명채(李命采)가 지었다.1753년(영조 29)에 여표비문을 대사헌 민우수(閔愚洙)가 짓고 1775년(영조 51)에 비를 세웠다. 1871년(고종 8)에 오우정을 서원 옛터에다 옮겨 세우고, 1874년(고종 11)에 오우선생실기(五友先生實記)를 간행하였다. 지금 밀양시 삼랑진읍 낙동에 오우정이 현존해 있으며, 매년 향토의 유림과 그의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어 아름다운 삶의 한 증표로서 기리어 오고 있다.
  • 호는 모애당(慕愛堂). 휘는 경수(景秀). 본관은 밀성(密城). 조선 순조 25년에 상동면 안인리에서 박이신(朴履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이웃을 도와 1858년(철종 9)에 이 마을에 살던 김주택(金周宅) 등이 관에 글(狀)을 올리니 관에서 쌀과 고기를 상으로 내렸다. 1868년(고종 5)에 김낙천(金洛天) 등이 다시 부사 원세철에게 글을 올려 부사가 비단옷을 상으로 내렸다. 1876년(고종 13)에 흉년을 당하자 동민들이 나라에 바칠 세금 미납액 15양(兩)을 스스로 부담 납부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식량을 나누어 주어 구제하니 본 마을 도검(都檢) 손 모씨의 첩보와 감관(監官) 구문선(具文善)이 고하여 관에서 특상을 내렸다. 1880년(고종 17)에 별세하니 선생의 효우와 선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을 사람들과 후손들이 상의하여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덕산동 마을앞에 모애당(慕愛堂) 박공기적비(朴公紀蹟碑)를 세웠다.
  • 조선 개국 초기의 효자, 장수. 호는 어변당(魚變堂). 휘는 곤(坤). 본관은 밀성. 조선 태조때 밀양군 무안면 연상리 상당동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집안이 가난하여 집안 빈터에 못을 파고 물고기를 길러 부모를 봉양하였다 하며 고기가 용으로 변하여 승천하면서 남겨놓은 비늘로 "말다래"를 만들어서 전장에 나가 공을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전설편 참조) 태종 11년(1411) 그의 나이 21세때 무과에 급제하여 세종 1년(1419)에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막하로서 대마도 정벌에 종군하였다. 세종 4년(1422)에 남해안 일대의 왜구를 토벌하는 작전에 종군하면서 큰 공을 세웠다. 세종 5년에 남해안 왜구정벌의 공으로 이천(梨川)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세종 10년(1428)에 북방 변경 요새인 삼수갑산(여연,강계,만포)등 국경지대의 진보를 다스리며 오랑캐들을 격멸하여 삼수(三水)에는 박곤 장군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세종 11년 12월에 첨총제(僉摠制)로 영전되었으며, 최윤덕 장군이 병조판서로 3도순문사(三道巡問使)로 재직할 때 그 순문사가 되어 북방 국경의 성기(城基)를 순신(巡審)하며 국방에 대하여 현책하였다. 세종 12년 6월에 공조참판이 되어 경수관 안문사로서 대정성을 살피고, 같은해 7월 호조참의로 승진되어 북방 국경지대의 성을 쌓는 일을 맡아 완성했다. 1431년 3도 연변에 성을 쌓았고,1432년 2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어 왕의 특명에 의하여 성기간심사(城基看審使)로서 풍천(황해도) 옹진성의 축성방법을 건의하여 정부 각 부처의 논의를 얻어 그대로 시행하였다. 1433년 11월 두만강의 남쪽 영북과 경원 2진 수복, 1434년 6월 평안도 성곽을 쌓았으며, 전라도 도관찰사,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제수되고 다시 강원도 도순무사(江原道都巡撫使)로서 주와 군을 순행하고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1435년 예조참판으로 제수받고 국방에 대한 23개조를 건의 하였으며, 성을 쌓는데는 박곤의 의견을 모두 따랐다. 같은해 9월 경상, 전라, 충청도 연변의 미완성된 성을 모두 완공하였다. 1436년 2월 명나라 영종 즉위에 하례사로 들어가 1440년 12월에 귀국과 동시에 한성판윤으로 임명 되었다. 1979년 12월 29일 경상남도 지정 지방문화재 제190호 지정(문화재편 참조)
  • 자는 언령(彦齡). 호는 채지당(采芝堂). 본관은 밀성(密城). 세종 24 임술년(1442) 8월 22일 밀양시 단장면 고사촌(姑射村=고례리)에서 태어났다. 자성이 따뜻하고 일찍이 재예를 갖추었으며 배움에 부지런하고 언행이 엄하여 어른스러웠다. 어른에게 효성을 다하고 친구를 사귐에는 돈독하였으며 부모를 섬기고 봉양함에는 항상 그 뜻을 따랐다. 부모님 상을 당하여서는 예절에 따라 제례용구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고 슬픔이 깊어 몸을 상하게 하였으며, 형제 5명이 한방에서 같이 살았는데 서로 네것 내것이 없고 샘하는 일이 없었다. 글을 읽음에 온 정성을 다하고 가난한 친척이나 친지들을 보면 반드시 도와줌이 그의 천성이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모든 책을 두루 읽고 그 이치를 꿰뚫었으며, 매일 아침 가묘(家廟)에 배알한 뒤에 물러나서는 책을 대하고 앉아 종일토록 공부하였다. 사람을 대할때에는 충정이 두터웠으며 급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도 내색을 하지않고 침착하였다. 그의 학문은 깊고 행실은 독실하며 성망이 높아 일찍 사마시(司馬試)를 거쳤으며 성종때(1470~1494) 벼슬에 올라 이조정랑 사헌부감찰 칠원현감(漆原=함안)을 역임하면서 백성을 다스림에 조리가 정밀하였다. 엄하고 어진 것이 각각 적절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학교를 일으켜 교화를 밝혀 읍의 자제들과 강론, 담론을 펴서 경서를 익히니 몇년안에는 군내에는 벼슬한 사람들로 가득찬 듯 하였다. 어느날 개연히 몇권의 책만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의 증조부 돈와 박시예공이 은거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성령의 양성에 힘쓰고 유학을 일으키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 들었다. 산수가 맑은 고례리 절경 아홉구비를 주자(朱子)가 살던 곳과 비유하여 구곡가(九曲歌) 시를 짓고 스스로 호를 채지당(采芝堂)이라 하였다. 중종 1년(1506) 병인 2월 21일 이곳 고사촌(고례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가 남긴 글과 정자 사호도(四皓圖)그림 등을 점필재 선생과 연루되었다하여 무오사화때 불살라졌으며 그 뒤에 그의 현손 낙춘(樂春)·양재(讓齋) 두 사람이 사호정(四皓亭)을 중창하였는데 한강(寒岡)·정구(鄭逑)선생이 양송을 지었고, 13세손 재용(在溶)이 연몰된 자취를 수습하여 유사 한권을 구상하고 묘갈은 고흥(高興) 이시좌(李時佐)가 지었다. 지금의 단장면 고례리 사희동(四熙洞)은 사호리(四皓里)에서 유래되었다.
  • 본관은 밀양. 벼슬은 좌통찬(左通贊).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서 송은 박익(朴翊)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재지가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벼슬길에 나아가 통예원(通禮院) 좌통찬(左通贊)에 재직하면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선생과는 친교가 두터웠다. 밀양향사의재(密陽鄕社義財)를 창안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상부상조(相扶相助)하는 정신교육을 통하여 도덕이 지배하는 향풍(鄕風)을 조성하였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자 몇년 동안 종적을 감추고 있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향년 61세로 세상을 마쳤다. 현재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 경모재(景慕齋)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 조선 태종때의 청백리. 본관은 밀성. 이름은 소(昭). 자는 회옹(晦翁). 호는 인당(忍堂). 1347년 7월 28일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서 태어났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스승으로 섬겼다. 1390년에 안음현감(安陰縣監-함양군 안의면)에 제수되어 청백, 선정 업적으로 백성들이 함양군 안의면 광풍루(光風樓) 옆에다 청백선정비(淸白善政碑)를 세워 그를 추모 하였다. 현감으로 재직하며 지은 거관자경시(居官自警詩),자관시(自寬詩),계사(戒辭)등의 글이 문집(忍堂集)으로 전해온다. ◎거관자경시(居官自警詩) 착하고 악함은 마음가짐에 있나니, 어진 사람 앞에서는 악함도 도리어 어질어 지는도다. 모든 것을 어질게 하고저 하면 마땅히 덕망을 펼쳐야하며, 포악함을 저지르면 스스로 망신을 초래하느니라. 한갓 착하기만 하면 위엄이 없을수도 있고, 사정을 두면 진실을 잃기쉽느니라. 무슨 약속이든 잊지말라. 성내고 급하게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하는 법이니라. ◎자관시(自寬詩) 백성이 배부르고 내가 굶주린다 하여도 내 굶주림은 도리어 배부른 것같고, 백성이 굶주리고 나의 배가 부르다 하여도 내 배불임은 굶주림과 다름이 없도다. 옛부터 굶주리고 배불림은 세상에 흔한 일인데, 누가 천심(天心)을 쫓아 배부르고 굶주림을 고르게 할꼬.그의 유허비(遺噓碑)는 밀양시 초동면 모선동에 있다.
  • 임란때 의병을 일으킨 수문장. 조선 명종 12년에 밀양군 상남면 동산리에서 밀양사람 박붕(朴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재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여 글을 읽다가 쉬는 시간이면 활쏘기와 말달리기 등 무술을 연마하였다. 1579년(선조 12) 무과에 올라 수문장(守門將)에 임명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란을 당하여 유정(柳汀)·유백춘(柳伯春)·박인국(朴仁國)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부사 박진(朴晋)의 휘하에 들어가 작원관(鵲院關) 전투에 출전 하였는데 막강한 왜병들에게 밀리어 의병들과 같이 울산·경주 방면으로 옮겼다. 울산 경주지방에서 왜적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단신으로 말을 달려 적진을 유린하였다. 동천(東川)에서 이여량(李汝良)과 항전하고 적선이 태화강으로 돌입하자 의병들과 함께 밤 어둠을 이용하여 적진을 불살랐다. 1592년(선조 28) 9월 삼랑포(三浪浦=삼랑진) 전투에서 일곱번 싸워 크게 이겼다. 1596년(선조 29)에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휘하에서 정유재란에 종군하여 대구 달성에서 수비하고 있던 김응서(金應瑞) 병사의 진으로 가서 적군의 머리를 많이 베어 큰 전공을 세웠다. 전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을 결정한 차례는 제 2등에 올리고 정 6품 진용교위(進勇校尉)로 녹권(錄券)을 사급(賜給) 받았다. 1605년(선조 38) 4월 16일 선무원종공신2등(宣武原從功臣二等)으로 봉하였다. 1619(광해 11)에 향연 6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본관은 밀성(密城). 벼슬은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 조선 선조 5년 11월 5일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 무진재(無盡齋)에서 박신(朴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허미수,장여헌(張汝軒), 손모당(孫慕堂), 손오한(孫오漢), 김태허(金太虛) 제현들과 도의로써 교우하였으며 총명하고 어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각처의 선비들과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창녕 화왕산성 망우당 곽재우 휘하 의병들과 같이 참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618년(광해 10) 선조대왕의 계비 인목대비의호를 삭탈하여 폐모함에 따라 불의를 참지 못하여 조정에 글로써 상소(草疏叫閣眞言)하였다. 1636년(인조 15) 병자호란을 당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도중에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개한 뜻을 말하기 보다는 시를 지어 남기고는 산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며 스스로 숭정처사(崇楨處士)라 일컬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를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류해(學問類解), 도통연원(道統淵源),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門淵源錄), 의례견문해(疑禮見聞解) 등과 국담문집(菊潭文集)이 있다. 후손들이 공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 정사 5간을 지어 공의 호를 따서 국담재(菊潭齋)라 편액하고 재실 경내에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에 위패를 모시고, 경북 청도 각북 남산동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서도 배향하고 있다.
  • 자는 경로(景老). 호는 국담(菊潭). 본관은 밀성(密城). 벼슬은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 조선 선조 5년 11월 5일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 무진재(無盡齋)에서 박신(朴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한강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허미수,장여헌(張汝軒), 손모당(孫慕堂), 손오한(孫오漢), 김태허(金太虛) 제현들과 도의로써 교우하였으며 총명하고 어질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임진왜란을 당하자 각처의 선비들과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창녕 화왕산성 망우당 곽재우 휘하 의병들과 같이 참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618년(광해 10) 선조대왕의 계비 인목대비의호를 삭탈하여 폐모함에 따라 불의를 참지 못하여 조정에 글로써 상소(草疏叫閣眞言)하였다. 1636년(인조 15) 병자호란을 당하여 다시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는 도중에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개한 뜻을 말하기 보다는 시를 지어 남기고는 산에 들어가 숨어 살면서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며 스스로 숭정처사(崇楨處士)라 일컬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증 통정대부 호조참의(贈通政大夫戶曹參議)를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독서지남(讀書指南), 학문류해(學問類解), 도통연원(道統淵源), 동방학문연원록(東方學門淵源錄), 의례견문해(疑禮見聞解) 등과 국담문집(菊潭文集)이 있다. 후손들이 공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 정사 5간을 지어 공의 호를 따서 국담재(菊潭齋)라 편액하고 재실 경내에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에 위패를 모시고, 경북 청도 각북 남산동의 남강서원(南岡書院)에서도 배향하고 있다.
  • 1900년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배움에 뜻을 두고 학문을 쌓았으며 일제하에서는 야학과 서당을 경영하며 후진 교육에 힘써 문맹퇴치 사업에 공헌하였다. 1960년 회갑연의 경비로 장학답(奬學畓) 831평을 사서 기증하고 그 뒤 907평을 더하여 1973년 12월 29일 송강장학회(松江奬學會)를 발족시켜 매년 산외면 출신 영재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학생들의 앞날을 밝혀주고 있다. 산외면 초등학교에서는 송강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장학기념비를 교정에 건립하여 그의 정신이 전해 가도록 하였다.
  • 조선 단종선위 때의 절의신. 이름은 시예(時乂). 자는 덕부(德夫). 호는 돈와(돈窩), 성은 박(朴)씨, 본관은 밀성(密城) 사람이다. 조선 태조(1392~1398) 때의 증찬성사이조판서(贈贊成事吏曺判書) 박신열(朴臣悅)의셋째 아들로 태어나 자품이 빼어나고 재예를 일찍 이루어 태종(1401~1418)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청송부사(靑松府使) 안호서제학(按湖西提學)에 이르렀다. 1455년 6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함을 보고 관복을 찢어버리고 처자들을 거느리고 고사(姑射-단장면 고례리)의 극히 좁은 협곡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며 스스로 호를 돈와라 지어 부르며 그 뜻을 되새겼다. 그의 시에 이르기를 천년 산나무는 무능함을 부끄러워 하며 일편단심은 꿈만 같구나. 능(陵)의 붉은 도장끈이 나타나는 새 아침에 가마귀가 모자를 벗기고 흰구름은 옛마을에 사슴과 벗하여 앉아있는 샘과 돌의 그윽한 정을 보네. 일어나 먼 장안(서울)을 바라보니 방울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는데, 정성을 드리운 해바라기는 대월 남쪽에서 그치고, 한강물은 눈 속에 가득하네.
  • 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의 사람. 자는 경화(景華). 호는 모헌(慕軒). 본관은 밀성(密城)이며 박항(朴恒)의 아들로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천자(天資)가 순각(純慤)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생원 김천수(金天授)에게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어머님과 할머님 상을 한꺼번에 당하였으나 이웃 마을의 친척들은 모두 피난을 가버리고 혼자서 시신을 수습하여 집안에다 가매장하고 어머니와 할머니의 혼령을 모셨다. 집에 다다른 왜적이 선생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이 집에는 하늘이 낳은 효자가 있으니 절대로 침범하지 말라!"는 방을 써 붙이고 효자에게 해가 있으면 안된다면서 약을 남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 뒤 삼랑진읍 대실(竹谷)에 어머님과 할머님을 안장하고 조석으로 집에서 상을 드리며 밤에는 시묘막에서 묘소를 돌보았다. 그러던 어느날 상식(上食)을 드리기 위하여 집으로 오던 도중 강나루에 도착하니 밤사이 내린 비로 큰 호우가 범람하여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어머님, 할머님의 상식을 드릴 수 없어 강뚝을 오르내리며 통곡하니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갑자기 강물이 양편으로 갈라지며 강 속에 길이 생겼다. 강 속에 뚫린 길을 따라 건너온 뒤 뒤돌아보니 황토물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 나라에서 이조참의(吏曺參議)의 벼슬을 증직하였다.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선생의 여표비각(閭表碑閣)은 도사(都事) 김도화(金道和)가 찬하였다.
  • 밀성(密城) 박(朴)씨의 시조인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침)의 아드님이다. 고려 태조를 도와서 개국한 공이 있으므로 진무공신 삼중대광 삼한벽공도대장군(鎭撫功臣三重大匡三韓壁控都大將軍)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등임되었다. 1676년(조선 숙종 2)에 숙종대왕이 민간 암행을 위해 밀양에 행차한 적이 있었다. 밤에 밀양읍 가곡동 용두목에 이르렀는데 불량배들이 몰려와 행패를 부리려 할때, 돌연 한 장군이 나타나 불량배들을 몰아내고 홀연히 사라졌다. 숙종께서는 관아에 돌아와 부사에게 물으니, 아뢰기를 이고장에 옛날 박 도대장군(朴都大將軍)이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자 숙종께서는 죽은 장군이 자신을 보호한 것을 크게 기뻐하여 밀양읍 신당촌(神堂村-지금의 내일동 5동)에 성황사(城隍祠)를 짓고 장군의 소상(塑像)을 봉안하고 고을 사람들이 제향을 받들게 하였다 한다. 그 뒤 부북면 용지리 서편 반월산(半月山) 기슭으로 옮겼다가 다시 교동 추화산(推火山)에 옮겼으며 1948년에 정부의 명에 의하여 밀양읍 내일동 밀성재(密城齋) 동편으로 옮겨 장군의 아들 요동독포사(遼東督捕使) 박란(朴란)의 위패와 함께 봉안하고 익성사(翊聖祠)라 개칭하여 봄, 가을로 후손들이 제향을 받들고 있다. 밀양군 삼랑진읍 낙동 가야산성에도 박대장군(朴郁都大將軍), 손대장군(孫兢訓密城大君)의 위패를 모신 성황사가 있다.
  •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경배(景培). 시호는 절사(節士). 집안이 대대로 밀양의 대성으로 고려 때 장수 박성진(朴盛進), 밀산군 박밀양, 시중 박득중, 정종 부마 박갱의 후손이다. 임진란에 밀양에 적들이 쳐들어오자 나이 17세에 아직 결혼 전인데 아버지와 함께 산속으로 피란을 갔다가 내려와서 부친을 봉양하기 위하여 곡물을 지고 가다가 적에게 잡혔다. 정유년(丁酉年: 1597)에 적들이 철수하여 돌아갈 때 절사를 배에 태우고 함께 바다를 건너며, “조선의 진귀한 보화를 얻는 것보다 이 사람 하나를 얻는 게 더 낫다.”라고 말했다. 적 가운데 관상을 보는 자가 절사의 골격이 범상치 않음을 보고는 반드시 국난에 임하여 몸을 바칠 만한 자라고 하여, 저들이 절사를 반드시 자기네 장군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을사년(乙巳年: 1605) 봄에 조정에서는 사명대사를 일본으로 보내 포로로 잡힌 남녀 3천여 명을 데리고 돌아오게 하여, 절사는 나이 서른에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절사는 기골이 장대하고 8척이나 되는 훤칠한 키에 호걸스러운 기상을 지녔으나, 일본에 머무른 9년 동안 저들의 부녀자와 짝을 이루지는 않았다. 고향에 돌아와서야 부친이 병란 중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상례를 행하여 돌이켜 최복 3년을 입었다. 절사는 같은 마을 사람으로 벼슬을 지낸 손기양(孫起陽) 선생을 찾아가 서책 한두 종을 통달하도록 배웠고, 절도사 김태허(金太虛)에게 활쏘기를 배웠다. 집에서는 책을 잡고 나가서는 활을 당겼으며, 잠자리에서나 식사할 때나 걸어 다니면서까지도 입으로 외고 손으로 익혀, 비바람이 불든 춥거나 덥든 간에 밤낮으로 그치는 때가 없었다. 사람들이 혹 손가락질하며 미쳤다고 하니 절사는 이내 웃으며 응대하기를, “남보다 늦게 배우는 자가 촌각을 아끼지 않으면 가는 세월을 어쩌겠는가?”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대황궁(大黃弓)을 혼자 밟아 시위를 매길 정도로 힘이 세고 말 위에서 활쏘기를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절사는 정사년(丁巳年: 1617)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그 이후로도 10년 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웃들이 벼슬하기를 권하자 절사는 이렇게 말했다. “무신이면서 시대가 태평한데 벼슬에 나가서 절개를 꺾고 권세 있는 귀족들에게 아첨하여 봉급이나 바란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 그러다가도 남북 오랑캐의 어려움과 우환에 이야기가 미칠 때면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칼을 쭈뼛 세우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비장함을 드러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여 급히 모든 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금나라 호적을 정벌할 때에 옷을 벗어 던지고 일어나 급히 관가에 나아가서 청(請)하기를, “국가에 난이 있으니 원컨대 군사 한 떼를 자원하고 오랑캐를 대적하겠다.” 하니 밀양부사 여우길(呂祐吉)이 그 태도를 장하게 여겨 궁도와 솜옷 한 벌을 주었다. 정월 20일 군대가 안주(安州)에 주둔하였다. 다음날 아침 먹기 전 수많은 적들이 폭풍우처럼 갑자기 쳐들어왔다. 우리 군대는 상장군이 전사하자 나머지 무리들도 궤멸하였다. 절사만이 홀로 수하 병졸들과 함께 성책(城柵)에 몸을 숨긴 채 병졸로 하여금 화살을 연달아 뽑아 주게 하고 자신은 활을 당겨 적을 쏘니, 활을 당기는 족족 적들이 쓰러졌다. 이 때 적들의 창과 화살이 갑자기 쏟아지자 사람들이 모두 새떼처럼 혼비백산했다. 수하 병졸 가운데 같은 마을 사람 손운강(孫雲江)이란 자가 절사의 소매를 붙잡고 외쳤다. “상황이 급합니다. 이대로 죽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어쩌시겠습니까?” 그러자 절사가 성을 내며 칼을 뽑고 말했다. “나는 죽음을 왔던 데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기거늘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절사가 말을 타고 싸우는 동안 손운강은 이미 무기를 끌고 백보 밖으로 도망갔는데, 절사가 말에서 떨어져 죽은 곳을 돌아보니 적을 꾸짖는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듯하여 뼛속까지 서늘하게 전율이 일었다. 절사가 순국했을 때 춘추가 쉰여섯이었고, 슬하에 어린 아들 하나가 있었다. 손운강이 고향으로 돌아가 홀로 남은 아들을 만나 통곡하고는, 정월 21일에 있었던 절사의 의로운 죽음에 대해 그림처럼 생생하게 고하였다. 이를 들은 사람들이 원근에서 모두 와서 조문하였다. 또 같은 군의 병사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인 박평남(朴平男)에게 물어보니, 그도 역시 절사의 휘하에 있던 자였는데 보고 기억하는 것이 손운강이 말한 것과 일치하였다. 경상 관찰사가 박절사의 귀한 사연을 조정에 아뢰어 節士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고 함께 형조좌랑으로 증직되었다. (박절사전(朴節士傳, 신유한作(申維翰: 1681~1752) 인용)
  • 고려말의 충신. 휘는 익(翊) 일명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밀성. 벼슬은 예부시랑 겸 중서령(禮部侍郞兼中書令)을 지냈다. 신라 밀성대군의 후예인 문헌공(文憲公) 은산군(銀山君) 영균(永均)의 아들이다. 고려말 1332년에 밀양시 부북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공민왕때 벼슬에 올라 예부시랑 세자이부 겸 중서령에 올라 공양왕까지 3대를 섬겼고 충성을 다해서 나라를 도왔다. 이성계와 더불어 왜놈과 변경 호적을 여러번 정벌하여싸울 때마다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장상(將相)의 재목이라 지칭 하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져 국정이 날로 어지러워 지자 선생은 마음에 강개함을 품고 벼슬을 버렸으며, 이성계가 혁명을 하자 문을 닫고 72현과 같이 두문동에 은거해 계시다가 시를 지으며 아우 밀성군 천경과 더불어 밀양 시골집에 내려와 임금과 송도를 회포하며 후학에 힘썼다. 포은, 야은, 도은과 더불어 도의로서 사귀었는데 고려가 망하자 부조현에서 서로 손을 잡고 통곡하며 하늘에 두 해가 없고,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 송죽같은 충절을 시와 글로써 읊조리며 이조(이씨조선)의 곡식(녹)을 먹지 않겠다고 충의로서 맹세하였다. 태조 3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선생을 공조판서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고, 또 이어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않았으며, 2년 후에 좌의정으로 다시 불렀으나 일어나지 아니하고 충신의 도리를 다했다. 29세에 입지잠(立志箴)을 저술하여 학문을 배우는 바른태도를 논하였으며, 지신잠(持身箴)을 저술하여 사람의 마음과 몸가짐의 지표를 세웠다. 또 하도낙서와 성리학에 대한 학문을 깊이 탐구하였다.
  •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서 박병구의 딸로 태어나 장성하여 청도 김기석(金棋錫)과 결혼하였다. 그의 남편은 나이 20세가 지나자 우연히 범상치 않은 병에 걸려 오랫동안 신음함에 갖은 정성을 다하였으나 아무런 보람도 없이 끝내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는 자녀가 없어 친척 수영으로 뒤를 잇게 하니 그때 부인의 나이 29세였다. 너무나 애통하고 망극하지만 겉으로는 평상시와 같이 조금도 근심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시부모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 애쓰더니 상이 끝나는 날 새벽 뒷뜰에 들어가 목을매어 사경에 있는것을 집안 사람들이 발견하여 화를 면하였다. 시부모가 울며 말하기를 "네가 자진하여 가장의 뒤를 따르려 하나 자식을 교육하고 성취시켜 후사를 완전케 함이 옳으니라"하니 부인이 반성하여 침선을 잡고 농사를 지으며, 길쌈하여 생계를 도모하고 양자 수영(秀永)이 또한 자식의 도리를 다하여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글을 읽고 근검 절약하여 집안의 두서가 잡히니 밀성 박태영(朴台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니 부부가 힘을 다해 가산을 이루니 몇년만에 집안에 윤기가 가득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수영이 또한 병을 얻어 고부간에 전심 전력하여 구호 하였으나 수년간의 정성도 보람없이 33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집안에는 2대의 미망이 있고 1남 3녀의 어린 자식과 재산은 약값 장례비로 다 쓰이고 가난이란 먹구름만 가득하였다. 또 며느리 박씨가 병을 얻어 53세로 세상살이를 마치니 부인의 비통함을 뉘라서 형용하랴. 25세의 남편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대를 이을 양자 또한 33세의 젊은 나이로 사별하고 며느리 또한 앞서 보내는 심정을 무엇으로 헤아리랴? 종중의 장로들이 모여 절부(節婦)로 표창코자 하니 상받기를 거부하였으며, 이 뒤로 눈물과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다 1961년 3월 9일 80세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박씨부인은 여필종부(女必從夫)의 부도(婦道)를 지켜 수절(守節)하였으며, 가문을 계승하게 하였고, 많은 불행을 참고 견디며 낮에는 밭갈고 밤에는 베를 짜서 근검 절약하여 한 집안을 일으켰다. 1982년 2월 4일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 소고동에 "김절부박씨행적비(金節婦朴氏行蹟碑)"를 세워 여성들의 귀감으로 전한다.
  • 동생에게 혈육피(血肉皮)를 제공한 우애. 자는 준하(俊夏). 휘는 종필(琮弼). 본관은 밀성(密城). 직함은 통덕랑(通德郞). 조선 고종 29년 8월 3일 산외면 남기리에서 군수 박상일(朴尙鎰)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어질고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돈독하였다. 넷째동생 종숙(琮肅)군이 9세 때에 바른편 다리에 화상을 입어 서지도 걷지도 못하는 모양을 보고 통곡하며 동생을 등에 업고 부산 도립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병원고 급히 집으로 달려와서 아버지에게 진찰한 결과를 말씀 드린 뒤 자기의 살점을 제공하여 치료케 하도록 허락하여 주시기를 간청 하였다. 아버지는 말하기를 어린 자식을 구하려다 다 큰 자식을 상하게 한다 하여 이를 반대하며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 하룻밤 하루낮을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애걸하여 허락을 받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가서 자기의 살점을 제공하겠으니 동생을 치료해 주길 요청하였다. 병원측의 회의적인 태도를 강권하여 두차례에 걸친 피부이식수술로 동생 종숙은 완치 되었다. 이 사실이 고을에 알려지자 모두 다 감탄하였으며, 당시의 보국판서(輔國判書) 민영휘(閔永徽)·전 홍문관 시독 박해철(朴海澈)·밀양군수 원적상·유림대표 노상직(盧相稷) 등 향내 유림 수백명이 표창하고 시문전서(詩文傳序)로 향장록(鄕奬錄)을 발간하여 천양 하였다.
  • 은산부원군(銀山府院君) 박영균(朴永均)의 5대손으로 해루당(奚陋堂) 박문손(朴文孫)의 현손이며, 자는 대지(大之). 호는 모와(慕窩). 휘는 주(胄). 본관은 밀성(密城). 벼슬은 군수(郡守)를 지냈다. 일찌기 영민하여 학문을 좋아 하였으며 효우충신(孝友忠信)하고, 벼슬길에 올라 이산군수(理山郡守)로 재직할 때에는 여러가지 공무를 공평정대하게 처결함으로써 그 고을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목민관(牧民官)이라 칭송하여 청정비(淸政碑)를 세웠다 한다. 소년 시절부터 성품이 따스하고 선량하며, 항상 부모님의 뜻에 따랐고 공경을 다하여 봉양함에는 즐거움을 다하였으며, 병중에는 곁에 앉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친상을 당하여서는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생전과 같이 묘소를 살피며 3년을 시묘(侍墓) 하였다. 1609년(광해군 원년) 순효(純孝)로 정여(旌閭)를, 1710년(숙종 36)에 정여각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 세웠다.
  • 연산군 때의 간관(諫官). 호는 오졸재(오拙齋=오拙子). 밀양사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성종(成宗) 16년(1485)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예천(醴泉) 태수가 되었다. 연산군 때 간관(諫官)이 되어 왕의 실정을 극간하다가 벽동(碧潼)으로 귀양갔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 때에 처형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실기 1권이 있으며 예림서원(禮林書院), 남강서원(南岡書院) 및 함안의 덕암원(德巖院)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 밀양인.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고려 우왕 11년에 17세로 등제하여 전교서(典校暑) 주박(主薄), 진덕박사(進德博士)를 역임하였다. 조선개국 후에 칭병(稱病) 불사(不仕)하다가 태조 5년(1396년)에 비로소 교서감승(校書監丞) 지제교(知製敎)로 나아갔다. 태종 8년(1408년)에 문관들을 친시(親試)하였는데 공이 장원으로 뽑혀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 겸 수문전직제학(修文殿直提學) 지제교(知製敎)로 특배되었다. 동 17년에 예문관 대제학 겸 대사성으로 숭배되고 다음해에는 우보객(右寶客)을 겸하고 다시 예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로 옮겨졌다.세종때 집현전을 세우자 동 2년에 공이 그 대제학을 겸하게 되었으며 동 8년에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겸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승배되었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총명이 뛰어나고 호학불권(好學不倦)하였으며 정포은(鄭圃隱), 권양촌(權陽村)의 제문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20여년간 대제학으로서 국초의 전장(典章) 문물(文物)에 공헌이 많았고, 중국과의 외교사명(外交辭命)을 전담하였다. 세종때 중국에 대한 금, 은의 세공을 영제(永除)케 된것도 공의 제진(製進)한 문자에 말미암은 바 컸다. 여러 차례 대, 소 과거의 고시관을 맡아 한결같이 지공 엄정하게 사류를 선발함으로써 고려 말기의 문란했던 과거제도를 이때 바로잡게 되었다. 공은 마음가짐이 견확(堅確)하여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량이 넓어 소절(小節)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흥학(興學), 천현(薦賢)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삼았으니, 국초의 명사들이 공의 문에서 많이배출되었다. 유저로 [춘정집(春亭集)]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에서 살았던 밀성박씨 채지당(採芝堂) 박귀원(朴龜元)의 후손 박지열(朴志悅)의 처인데, 나이 31세에 지아비가 죽은 다음날 몇말의 피를 토하고 죽었다. 침실 벽에 언문(한글)으로 쓴 글을 걸어 두었는데 "살아서는 2성(姓)이 합하였고, 죽음에는 같이 돌아간다" 하였다. "지아비를 따르는 조처와 모양이 급작스럽지 아니하면서 급급한 사람이다"고 유장(儒狀)에 전하였다. 밀양시 단장면 미촌리 사촌동 앞 독산(獨山)에 지아비와 합분(合墳)하고 순열비(殉烈碑)를 세웠다.
  • 호는 심재(心齋). 휘는 광욱(光旭). 정조 15년 6월 20일 부북면 가산리에서 설찬(薛瓚)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0세에 아버지가 별세 하였는데 애통해 하는 모습이 어른과 같아 조문객들을 감동 시켰으며, 자신의 부덕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 죄인이라 하였다. 24세 때 어머님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매일밤 하늘에 기도하고 약을 사용하였더니 차차 차도가 있어 어머님 병이 완캐 되었다. 26세 때 어머님이 큰 종기를 앓아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입으로 종기의 고름을 빨아 내고 약을 붙였다. 어머니 병이 점점 심하여 상처 주변에 이가 들끓게 되자 자신의 머리에 이가 옮겨 오도록 하여 이를 잡았다 한다. 또한 용변의 맛을 보아 병세의 정도를 가늠하였다. 어느날 어머님이 손명할 징조를 보이자 손가락을 끊어 떨어지는 선혈을 어머니 입안에 넣어 수혈하니 다시 깨어나 하루를 더 견딜 수 있었다. 1817년 9월에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니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여 어머니를 여의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어머님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북면 무연리 뒷산 정상에 장례를 치룬 뒤 묘소 아래에 초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시작 했다. 이곳은 원래 험한 산 정상인데다 동리 가까이에 내려와야 물을 구할 수 있었다. 물이 없으면 없는데로 풀잎의 이슬로 목을 축이며 지나던 어느날 갑자기 맑은 샘물이 솟아났다. 하늘이 감동한 샘물을 마시며 3년 시묘살이를 마치니 샘물도 말라 없어졌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밤마다 맹수가 찾아와 그를 지켜주었고 시묘살이가 끝난 뒤에도 매일 성묘를 다니니, 마을 사람들이 묘소까지 길을 닦아 성묘길을 편하게 해 주었다. 부모를 모시는 일에 너무 지극하여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으로 그도 자리에 눕게 되었다. 의원을 불러 약을 권했으나 "약 처방을 몰라 어머님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공연히 두 손가락만 잘라 부모가 남겨준 몸을 훼손하였으니 나같은 죄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하고는 약 들기를 사양했다. 병때문에 성묘를 못함을 한탄하며 순조 22년 6월 28일 3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했다. 사람들의 뜻에 따라 염천문을 책으로 엮고,1981년 6월 그가 살았던 부북면 가산리 마을앞에 事蹟을 새겨 비각을 세웠다.
  • 임란 때의 의병·대도호부사. 자는 경징(景徵). 호는 오한(오漢). 휘는 기양(起陽). 본관은 광리(廣理=밀양의 故號). 명종 14 기미년(1559) 7월 20일 밀양부의 동쪽 용성리(龍城里=용평리)에서 태어났다. 나이 4세때 말과 문자를 해득하였고, 10세에 입학하여 15세에 小學과 四書를 익혔다. 21세에 논어를 읽고 27세에 별시(別試)와 초시(初試)에 합격하였으며, 진사회시(進士會試)에 3등을 하였다. 29세때 노개방(盧蓋邦)과 함께 재약산(載藥山)에서 같이 공부하여 30세가 되던 선조 16년 무자년(1583) 3월에 급제하였다. 31세 때 성주(星州)교수가 되고, 32세 때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 들었다가 33세였던 선조 24 신묘년(1591) 가을에 성주로 돌아왔다. 선조 25 임진년(1592)4월에 왜병들이 밀려오자 양친을 모시고 호거산(虎踞山=운문산)으로 피난하였다. 마침 호거산 아래에 있는 석동(石洞=석골사)에서 진사(進士) 이경승(李慶承) 등을 만나 향병(鄕兵)을 소집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밀양부사 박진(朴晋)의 영병(領兵)이 이곳에 주둔해 있었는데 이들과 더불어 작원(鵲院=삼랑진읍 작원관) 대암(臺巖=산내면 용전리)에서 적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선조 27 갑오년(1594) 36세때 도회시관(都會試官)으로 경주에 갔다가 운문산 아래 금현(錦峴)에서 복병으로 많은 적을 쏴 죽이고 격퇴하였다. 선조 28 을미년 37세 때 신녕현감(新寧縣監)이 되었다. 창녕 화왕산 전투에서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郭再佑) 군에 합세하여 대승전을 거두었으며, 전란 중에 안동 이상의 군량 및 군수품 보급을 담당하여 맡은 바 책임을 다하였다. 임란의 여러 싸움에서 많은 공적을 쌓아 선무공신3등(宣武功臣三等)을 받았다. 신령 현감·성균관전적·영천 군수·경주 제독·창원 대도호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전란 뒤의 민심수습에 전력을 다하여 백성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았다. 광해군이 등극하여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땅 맑은 시냇가에 은둔하였다. 그 뒤 司諫院掌令兼尙州牧使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 청렴한 생활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았던 그는 문장과 도학근기(謹記)하였으며, 발문은 강고 유심춘(柳尋春), 묘지명은 다산 정약용이 근서 하였다. 제향은 단장면 미촌리 칠탄사(七灘祠)에서 받든다.
  • 조선 정묘호란 때의 의병장. 자는 계진(季進). 호는 문탄(聞灘). 휘는 린. 본관은 안동(安東).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의 5대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선조 39년(1606)에 급제하고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子)로 재직할 때 권신 정인홍(鄭仁弘)의 교만함을 직설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광해 경술년(1610)에 성균관 박사에 오르자 정인홍이 회제(晦齋) 이언적(李彦迪), 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문묘에 모시지 못하게 함을 정면으로 공박하다가 파직을 당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단성현감(丹城縣監)에 복직하여 10여년간 누적되어온 의혹사건을 해결하니 모두들 감복하였다. 인조 정묘년(1627) 정묘호란 때 우복(憂伏) 정경세(鄭經世)의 추천으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많은 공적을 쌓았다. 만년에 은퇴코저 하니 우복 정선생이 만류하였으며 숙종 무진년(1628)에 향년 63세로 별세 하였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만사에 "용맹스러운 말과 강직함은 누구와 더불었는지, 바른 말로 성난 세상과 다투었도다."하며 애도하였다. 봉산서원(鳳山書院)으로 개칭하였다가 1971년 밀양 혜산서원 숭덕사(崇德祠)에 복향하였다. 저서로는 문집 4권이 있다.
  • 손윤하(孫胤河)의 딸인데, 16살에 초계(草溪)사람 안근(安近)에게 시집가서 겨우 며칠 지나 남편이 죽어서, 울면서 3년 동안 예절을 갖추어 손수 잔을 올렸다. 복을 벗게 되자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그 나이가 젊은 것을 가엾게 여겨 수절하려는 뜻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손씨가 죽음으로 굳이 항거 하였다. 할아버지 위노(威怒)가 닥치자, 손씨가 몰래 뜰 안의 대나무 숲에 가서 목을 매었는데, 그 형이 마침 보고서 풀어주었다. 손씨가 곧 시가로 돌아가서 살았는데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먼저 지아비에게 제사 지내고 나서야 먹었다. 32살에 죽었다.
  • 일제시대의 신교육 선구자이다. 1906년에 밀양읍 교동에서 대지주 손영희씨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마음씨가 착하고 총명하였으며 불쌍한 사람을 보면 꼭 도와주었다. 국민학교 3학년때 반 학생들이 점심으로 감꽃을 주워 오려다가 지각을 하여 일본사람 선생에게 꾸중을 듣는 것을 보고 수업을 마친 뒤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아버님께 말씀 드렸더니 "우리 국민은 못 배운 탓에 일본 사람들에게 눌려 살며 굶주림을 당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뒤부터 매일 도시락 2개를 가지고 가서 급우들과 나누어 먹었다 한다. 밀양 국민학교와 동래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일을 도우며 마을 뒷산에 야학원(夜學院)을 세워 중학 과정까지 가르치는 한편 한글과 우리의 역사도 일깨워 주었다. 한편으로는 토지 경작자들에게 영농방법을 가르쳐 주고 소작료도 낮추어 받았으며 흉년이 들면 소작료를 받지 않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다정다감한 성품은 형제간의 우애 또한 극진하여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짓고 야학교 교사로서 10년을 보내면서 동생을 대학까지 공부 시켰다. 그리고 현재의 밀성 초등학교(당시는 제2보통학교)가 인가를 받게 되자 논 5,800평을 학교 부지로 희사하여 학교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5년 3월에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아까운 나이에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것이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이 되었다.
  • 자는 덕유(德裕). 호는 추천(鄒川). 본관은 밀성(密城). 퇴계(退溪) 문인. 1561년(문종 16)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안현감(禮安縣監)을 지냈으며, 퇴계 이황(李滉)에게 학문과 정치를 묻는 한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건립에 사재를 털어 조력하였다. 벼슬은 지평(持平)에 이르렀으며 만년에 오연정을 지어서 살다가 세상을 마쳤다. 추천집(鄒川集)이 전한다.
  • 임진왜란 때의 의병. 자는 덕보(德補) 또는 길보(吉補). 호는 윤암(綸庵). 처음의 휘는 경남(慶南), 다음의 휘는 우남(宇男). 본관은 안동(安東). 정평공 죽석 손홍양(孫洪亮)의 11대손. 광해 계축년(1613)에 증광진사(增廣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선생의 문인으로 박대암(朴大庵)·서낙재(徐樂齋)·장여현(張旅軒)·권동봉(權東峰)·정수암(鄭守庵)·정우헌(鄭憂軒) 등 제현들과 도의로서 사귀고 유교문화를 일으켰다. 그의 스승인 지산 조호익 선생이 그를 좋은 친구로 대하였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지효(至孝)로 조정에 추천되니 "나는 하늘을 속였다"하며 탄식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일제당을 구축하고 여러 동지들과 작전참모로서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많은 공적을 세웠다. 뒤의 사람들이 동산서당(東山書堂)을 짓고 그의 유풍을 사모 하였으며 정조 계묘년(1783)에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여헌(旅軒) 정현광(張顯光) 선생의 영천 입암서원(立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 1권이 있다.
  • 조선 세조때의 절의신. 자는 인보(引甫). 호는 격재(格齋). 휘는 조서(肇瑞). 본관은안동(安東 또는 一直). 벼슬은 통정대부호조참의(通政大夫戶曺參議)·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 경연 의금부사 홍문관제학 동지 춘추관 성균관사(贈嘉善大夫吏曺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事弘文館提學同知春秋館成均館事)·세자좌부빈객 오위도총부 부총관(世子左副賓客五衛都憁府副憁管). 조선 태종 임진년(1412)에 밀양시 용평리에서 청백리(淸白吏) 부사(府使) 손관(孫寬)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세종 임자년(1432)에 진사가 되고, 병진년(1436)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병조정랑(兵曺正郞)을 거쳐 단종 원년(1453)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외직인 봉산군사(鳳山郡事)가 되었다가 1455년 수양대군에게 단종이 손위함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세조가 이조참판(吏曺參判)에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스스로 "죽지 못한 사람"임을 자처하며, 옛 임금을 사모하여 여생을 산간에 묻혀 살았다. 그는 어릴때부터 배우고자 하는 뜻에 돈독하였고, 경학(經學)이 심히 깊어서 인생의 근원을 체득하여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제서연의(諸書衍義)를 저술하니 그의 도학(道學)을 한훤당 김굉필(寒喧堂金宏弼)·일두 정여창(鄭汝昌)이 스승으로 섬겼고, 문장과 학술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과 막상막하로 저명하였으며, 높은 충성과 큰 절개는 중국의 제현(諸賢)들에 비하여 삼인일치(三仁日致)라 하였으니 그의 풍절(風節)·도학(道學)·충효(忠孝)·문장(文章)은 동방 유학의 대종이라 하였다. 그의 두우(杜宇) 시에 "두견새도 나와 같아, 밤낮으로 끊임없이 우는구나"하여 옛 임금 단종을 사모 하였으며, 점필재 김종직선생이 시를 지어 그의 높은 충절을 찬양하였다. 정조 경신년(1800)에 임금이 예조에 특명을 내려 충의탁절(忠義卓節)로서 이조참판 양관제학(吏曺參判兩館提學)을 추증하고 그의 자손들에게 모든 세금과 잡역을 면제케 하였다. 그의 저서는 임진왜란에 불타 없어지고 문집 1권이 전해온다.
  • 임진왜란에 창의한 학자. 호는 모당(慕堂). 휘는 처눌(處訥). 본관은 안동(安東).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의 6대손.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50여년간 적통(嫡統)으로 이학(理學)을 모두 전수하였다. 임진왜란을 만나 대구 팔공산창의회맹(八公山倡義會盟)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팔조현(八助峴)에서 적을 달성(達城) 아래까지 크게 쳐부수니 조유사(詔諭使) 김학봉(金鶴峰)선생이 "참된 의병장" 이라 높이 추중하였으며 그 뒤 인조 갑자년(1624)에 이괄섭(李适燮)과 함께 정묘호란에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많은 공적을 쌓았으나 모든 공훈은 관군에게 돌리고, 황폐해진 향교를 재건하였으며 살던 영모당(永慕堂)에서 문회(文會)를 크게 베풀고 학문을 일으키니 한때 이름높은 학자들이 선생의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광해 경술년(1610)에 정인홍(鄭仁弘)이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퇴계(退溪) 이황(李滉) 두 선생을 문묘에 제사 지내게한 왕명에 대하여 저해함을 보고, 선생은 전국 유림을 대표하여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지어 사림(士林)에 통고하는 한편 상소문을 올렸다. 그 중에 있는 "용군암주(庸君暗主)"라는 네글자로서 선생을 벌주기를 청하는 무리들이 있어 화가 몸에 미칠듯 하였으나 선생은 "옳지 못한 것은 하늘이 알 일"이라 하며 태연하였다. 숙종 갑술년(1694)에 사림(士林)에서 청호서원(靑湖書院)을 창건하였는데, 그 천장(薦狀)에 이르기를 "옛 글을 많이 읽고, 무리들을 모아 가르쳤으며, 사악한 말을 끊고 배척하여, 바른 맥(正脈)을 심었다"고 하였다. 저서로는 한강예설중찬(寒岡禮說重纂), 가례의절전서(家禮儀節傳書) 및 문집 3권이 있다. 서산서원(西山書院)과 대구 청호서원(靑湖書院)에서 받들어 오다가 1970년에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에 복원하였다.
  • 휘는 태좌(台佐). 본관은 密城. 벼슬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광리군(廣理君) 손긍훈(孫兢訓)의 19대손이며, 부사직(副司直) 손치호(孫致豪)의 아들로 밀양 양양부곡(부북면 위양리)에서 태어났다. 자질이 총명하여 나이 8세에 근사록(近思錄)과 小學을 해독 하였으며, 10세에 四書三經을 다 읽고, 12세에 춘추효경(春秋孝經)을 두루 읽고 난 뒤에 탄식하여 밀하기를 "선비가 군자를 배움에 있어 근사(近思=근사록)·소학과 같음이 없다."고 하였다.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 지극한 효성을 다하였으며, 형제간에 우애 또한 남다르니 모든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집에는 항상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들로 붐볐으며, 선비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원했다. 1506년(중종 1) 과거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제수받아 여러 고을을 다스리면서 학문을 일으켜 백성들을 교화 하였다. 많은 저서와 작품이 있었지만 임진왜란과 여러번의 병화에 불타 없어지고 향토 밀양의 명승 경관을읊은 몇 편의 주옥같은 시가 역사의 향기를 담고 전해온다. 그의 후손들이 6대를 살던 창녕을 떠나 밀양군 부북면 덕곡리에 터전을 잡고 집성촌을 이루어 대를 이어 가면서 모선(慕先)하는 정성이 지극하니 향토 사림에서 덕곡재(德谷齋)를 짓고, 이를 지켜가기 위하여 제를 만들어 해마다 향사를 받들어 오고있다. 봉천사(鳳泉寺) 구름 흩어진 긴 하늘에 달빛은 맑고 밝은데 선탑(禪榻)에 문은 닫고 꿈을 꾸니 나그네의 혼이 맑아지네. 맑고 깨끗함은 옛과 같고 진실은 근원 또한 살아 있는데 내 평생 명리(名利)를 쫓았음이 부끄럽구나.(화약산에 있었던 신라고찰) 남수정(남秀亭) 옥야(沃野)는 가이없고 푸르름은 아득한데, 가을 강 백리길이 눈에 부셔라. 울고가는 기러기떼 하늘은 아득한데 어촌의 푸른대는 천만줄기 자라있네. 강은 흘러 동남으로 한폭의 그림인데, 사면에 쌓인 산이 바다 멀리 뻗어있네. 황학구 백운루를 어느 누가 정했던가. 이 속의 좋은 경치 나라에 이름높네. 비에 씻긴 호수는 거울같이 맑은데, 명사 10리 모래밭에 눈서리 맑아라. 먼 산에 구름지니 여인의 눈썹같고, 갈대숲 옥천경에 강물소리 출렁이네. - 이하 생략 -(삼랑진읍 낙동에 있었던 정자)
  • 자는 자함(子함). 본관은 평산(平山). 소는 석계(石溪), 송계(松溪)라 하였는데 죽은 뒤에 학자들이 높혀서 송계선생(松溪先生)이라 하였다. 연산군 5년 기미(1499) 11월 27일에 밀양 삽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는 일삼지 아니하였다. 일찍 松堂 朴英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도의를 강마(講磨)하고 성이(性理)를 토론하여 조예가 더욱 심오하고 소견이 더욱 고명하여 南冥 曺植, 黃江 李希顔, 大谷 成運, 三足堂 金大有, 聽松 成守琛, 東洲 成悌元 등의 여러 선생들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사귀어 마침내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됨에 그들이 외우(畏友)로 추대하였다. 돌이 맑은 개울가 송죽림(松竹林) 속에 몇간의 초당을 지어 석계정사(石溪精舍)라 하고 모여오는 제자들을 돈독히 행의(行義)로써 예절을 가르치고, 배움에는 반드시 小學을 먼저 가르쳐 儒學을 깨우치니 모두 다 공경하고 따랐으며,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선비가 그의 지역에 들어오면 가서 뵈옵고 그의 문앞을 지나가기를 두려워 하며, 모두 다 당대의 산림제상(山林帝相)이라 하였다. 나라에서 德行으로 여러번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평생을 백의(白衣)로서 살았다. 명종 17년 임술(1562) 5월 21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밀양읍 장선리(長善里=용평리)에 안장하였다. 명종 20년 을축(1565)에 남명 조식(曺植)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선조 4년 신미(1571)에 문인 박재(朴齋), 김유(金紐)가 행장(行狀)을 쓰고, 낙천(洛川) 배신(裴紳)이 행록(行錄)을 썼다. 선조 9년 병자(1576)에 부사 김극일(金克一)이 여표비명(閭表碑銘)을 지어 삽포리에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폐몰된 것을 인조 12년 갑술(1634)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발문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가 전(篆)을하여 중건하였다. 선조 39년 병오(1606)에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에 남명 조식선생과 병향(竝享)으로 입향(入享)하니 상향축문(常享祝文)은 입재(立齋) 정종노(鄭宗魯)가 지었으며, 광해 원년 기유(1669)에 사액(賜額)되었다. 인조 15년 정축(1637) 10월에 덕성서원(德成書院)이라 하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배향위(配享位)에 입향되고 현종 10년 기축(1669)에 사액되었다. 순조 15년 을해(1815)에 實紀 1책을 목판으로 간행하고 지금까지 장판(藏板)하고 있다.
  • 본관은 평산(平山). 이름은 동현(東顯). 자는 회숙(晦叔). 호는 매죽당(梅竹堂). 1641년 8월 21일 밀양군 상남면 조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터 남달리 효성이 지극하고 독서를 몸소 실천하고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것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이 깊었다. 어버이의 병환에 물고기(川魚)를 찾으므로 한겨울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다 드리고 또 "너의 머리에 어사화(御賜花)를 꽂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하시므로 과거는 마음에 두지 아니 하였으나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아니함이 나의 본분이라 어찌 문무(文武)를 가릴 것이냐 하고 곧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여 드렸으니 이때가 1676년(숙종 2) 그의 나이 36세였다. 친상을 당하여 3년의상복을 다하고도 또 3년간을 더 심상(心喪)하여 생시의 봉양과 같이 새벽 밤에 사당에 배알(拜謁)하고 곧 산소에 찾아가니 산의 오솔길이 한길이 되어 나뭇군과 목동들이 이 길을 일러 효자로(孝子路)라 하였다. 1699년(숙종 25)에 순찰사 이세재(李世載)가 그의 효행을 나라에 아뢰었으니 이는 살아있는 효자를 계달(啓達)한 특이한 사실로서 그의 효성을 실증한 것이 된다. 1706년(숙종 32) 11월 1일에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나니, 72일이 지난 1707년(숙종 33) 1월 12일에 나라에서 효행으로 창신교위 훈련원판관(彰信校尉訓鍊院判官)의 증직이 내렸다. 1708년(숙종 34) 1월 9일에 고을 사람들이 스스로 재산과 곡식을 내어 유허 옆에 사당을 세워 봉안하고 지효사(至孝祠)라 편액하고 중봉서원(中峯書院)이라 하며 일암(一庵) 신몽참(辛夢參)이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지어 봄·가을 중정일(仲丁日)에 제향을 받들었다. 1714년(숙종 40)에 같은 동리 출신으로 증병조판서 존인갑(孫仁甲), 증도승지 노개방(盧蓋邦), 효자 손약해(孫若海)를 중봉서원 지효사에 합향(合享)하여 충효사(忠孝祠)라 고치고 상향축문은 부사 김일석(金日錫)이 지었다. 행장은 주서(注書) 이명기(李命夔)가 쓰고 묘갈명은 대제학(大提學) 조성교(趙性敎)가 지었다. 문집은 매죽당선생일고(梅竹堂先生逸稿)라 하고 2권 1책으로 1916년에 목판으로 간행되고 판본은 밀양군 부북면 후사포리 사우정(四友亭)에 장판(藏板)되어 있다. 조선말 중봉서원이 훼철되고 중봉재(中峯齋)로 개칭하여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에 현존해 오고 있다.
  • 진사(進士) 수헌(睡軒) 남순길(南順吉)의 처로서 평소 시부모님을 섬기는데 정성을 다하고 공손하기가 이를데 없었으며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고 받들어 효부로서 널리 칭송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 왜병들의 노략질을 피해가던 중 사복골(단장면 미촌리 뒷산)에서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안씨부인을 희롱하려 하였으나 안씨부인은 나무를 끌어안고 대항하였다. 왜적들은 안씨부인의 팔을 칼로 베며 위협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순절하였다. 나라에서 이사실을 알고 정여각을 세워 부인의 정절을 기리었다. 그의 후손들은 밀양시 단장면 안법리 부락 뒷산 용연 밑에 단을 보아 추모 하였다.
  • 조선 영조·정조때의 학자. 자는 정진(正進). 호는 냉와(冷窩). 본관은 광주(廣州).동만(東巒) 안상한(安翔漢)의 현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는데 조정에서 그의 충직함을 시기하는 자가 있어 앞길이 순탄치 못함을 깨닫고 가진것을 모두 팔아 관동의 산수를 유람하고 돌아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순암(順菴)·안정복(安鼎福)등 여러 선생들과 도의로서 사귀기로 약속하고 은거한 서실에 취변재(聚辯齋)라 이름을 붙이고 강학(講學)하기를 독실히 하여 경서에 관한 경예(經禮)의 학식이 높아 세상에서 추앙하여 중히 여겼다. 후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움을 청함에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다. 문집은 선생의 호를 따서 냉와집(冷窩集)이라 하고 서문은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찬하고 갈명(碣銘)은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이 찬하였다.
  •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경태(景泰). 자는 중첨(仲瞻). 천품이 근검하여 빈곤에서 가산을 모았고 덕이 두터워 고을에서 불우한 사람을 구휼하고 많은 일화를 남기니 동민들이 삽포(부북면 사포리) 동구(洞口)에 "안씨의장비(安氏義庄碑)"를 세워 송덕하였다. 비문(碑文) 태산(台山=단장면 태룡리) 안씨가 삽포에 터를 장만하였는데 삽포는 옛고장이다. 그리하여 마을 안에 춥고 굶주린 자, 병 들어 신음하는 자, 돈이 없어 혼인이나 장 례를 제 때에 못 치르는 자,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며 구걸하는 자, 그 모두 그분들 의 힘을 입었다. 시초는 처사 휘경태(景泰)가 그 일을 시작하였는데 그 뒤에 성재(省齋) 휘정중, 만포(晩浦) 휘유중, 치와(恥窩) 휘효완을 지나 승지(承旨) 시헌(時 軒) 희원(禧遠)씨에 이르러 그 규모가 더욱 확장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은덕을 감사 하게 여겨서 그 장(庄)을 의장(義庄)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의(義)란 대중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옛적에 의창(義倉), 의사(義社), 의학(義學), 의정(義井)이란 것이 모두 이러한 따위를 말 한 것이다. 자사(子思)께서는 효(孝)란 사람의 뜻을 잘 이어 받아 행하는 것이요, 주역(周易) 설괘(說卦)에는 사람의 도(道)를 세우는 것은 인(仁)과 의(義)라 하였는데 승지(承旨)는 이것을 아울러 실천하였다. 마을 선계 도 열호(都烈浩) 조갑규(曺甲奎)가 함께 의론하여 삽포 동구에 비를 세우면서 나에게 비문을 부탁함으로 이에 서하노라. 1905년(광무 9) 4월 그믐날 광주 노상직(盧相稷) 삼가 씀 감수 안우달(安友達) 안종수(安鍾須)안경태
  • 자는 사중(思仲). 호는 태만(苔巒). 본관은 광주. 벼슬은 사간원 사간(司諫)을 지낸 조선 중종 때의 학자. 어릴 때부터 품성이 순수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또한 머리가 뛰어나고 학문을 좋아하며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함으로써 그 학덕이 고매하였다. 1494년(성종 25) 문과에 급제하여 청도군수, 사간원 사간, 남원부사, 종부사정(宗簿寺正) 등을 역임하였는데, 사간으로 재직할 때에는 충언으로 심정(沈貞)의 미움을 받았고, 외직으로 재직할 때에는 그의 업적이 당시의 제일이라 하여 고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조정에서는 청백리에 기록하고, 그의 업적은 동국여지승람, 청도명환록, 밀주지에 올렸다. 비문은 성호 이익(李瀷)이 지었다.
  •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명하(命夏).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와(松窩). 천품이 빼어나고 조예가 극심 하였으며 특히 효행으로서 향도(鄕道)가 추중하였다. 9세때 조모님 병환에 손가락을 끊고 수혈하여 소생케 하니 이 사실을 보고 들은 사람은 모두 다 감복하였다. 13세때 아버님 상을 당하여 예절을 지키며 슬픔을 어른과 같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지극한 효성이라 칭송이 높았다. 그 뒤 홀어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고 뒷뜰에 푸른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나 그 가지와 잎이 울창한데 그 밑에 송이가 자라나서 매일 캐어서 반찬으로 제공하니, 문암(門巖) 손석관이 송균설(松菌說)을 지어 옛날 왕상(王祥)이 한겨울에 죽순을 얻은 효성에 비하여 높이 찬양하였다. 19세때 갈암(葛庵) 이선생이 광양(光陽) 귀양살이로 부터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양(晋陽) 도중에서 뵈옵고 배우기를 청원하여 그 문하에 출입한 지 50년에 갈암(葛庵)의 도통(道統)을 계승하고 깊이를 더하니 그에게서 배우고저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어머님 상을 당하여 슬픔에 피를 토하며 죽을 마시고 3년 상례기간을 마친 뒤 형제간에 재산을 나눌때 좋은 논밭은 동생에게 나누어 주고, 친척과 이웃은 물론이요 남일지라도 불우한 처지이면 힘껏 도와 주는 인자한 성품을 가졌다. 그는 스승을 높이고 동료간의 절의(節義)를 돈독케 하였으며 갈암선생이 별세함에 도집례(都執禮)의 중임으로 장례를 마치고 스승의 복을 입었다. 1862년(철종 13) 향토 사림의 공의로 광천서원(廣川書院)이 건립 되었다가 조령에 따라 철폐된 뒤 불천위로 자손들이 제사를 받들다가 1979년에 향토 사림의 공의로 고취정(孤翠亭)에서 제사를 받들고 있다. 그가 남긴 글은 송와집(松窩集) 6권이 있으며 성재(性齋) 허전(許傳)이 서문을 짓고 대산한산(大山韓山) 이상정(李象靖)이 행장을 썼다. 그 밖에 배운록(排雲錄) 1권이 있다.
  • 병자호란에 창의. 자는 익중(翊仲). 호는 동만(東巒). 휘는 상한(翔漢). 본관은 광주(廣州). 낙원 안숙(安璹)의 아들이다. 어릴때 부터 성품이 활달하고 기질과 얼굴 생김이 위대해 보였으며 어떤 일에도 구애됨이 없었다. 일찍 경제(經濟)에 뜻을 두어 경사자집(經史子集=경서·사서·제자·문집)과 병형전곡(兵刑錢穀)의 글에 통달하였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임금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개연히 말하기를 "평생 글을 읽은 것은 오늘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하면서 양훤(楊暄), 이시노(李時老) 등과 함께 동지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켜서 상주지방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해 하면서 의병을 해산하고 고향 마을로 돌아온 뒤로는 벼슬의 뜻을 버리고 학문을 연마하며 여생을 보내었다. 진사 양훤(楊暄)과 사전(師傳) 노형필(盧亨弼) 같은 선배가 공의 경제포부를 세상에 펴지 못함을 탄식해 마지 않았다. 문집(文集)을 남겼는데 서문은 수당(修堂) 이만규(李萬珪)가 짓고, 행장(行狀)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이 찬하고, 갈명(碣銘)은 벽진(碧珍) 이흥중(李興中)이 찬하였다.
  • 임진왜란때 창의한 사람. 자는 시이(侍而). 호는 낙원(樂園). 본관은 광주(廣州). 벼슬은 형조정랑(刑曹正郞). 기개가 높고 문장이 탁월하였으며 임진왜란에 백의로서 의병을 자원하여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따랐는데 나이는 어렸으나 글이 뛰어났으므로 위에 올리는 글과 격문은 모두 선생이 도맡아 지었다 한다. 1605년(선조 38)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 원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 영천군수(永川郡守), 초계군수(草溪郡守),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등을 역임하였는데, 광해군의 북당이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에는 벼슬을 버리고 7년동안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시니 인조 임금때 정우복(鄭愚伏)과 이정구(李廷龜)가 경연에서 제일 먼저 선생을 천거하면서 북당에 오욕되지 아니하고 그 이름과 절개가 완전함은 남주(南州)의 안모 한 사람뿐이라 하였다. 문집이 발간되어 전해오며 서문은 분암(焚庵) 채재공(蔡齋恭)이 찬하고 갈명(喝銘)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찬하였다.
  • 자는 대지(待之). 호는 오휴(五休=五休子). 벼슬은 부정(副正). 본관은 광주. 재종숙인 안옥천(安玉川) 선생께 학문은 배웠으며 만년에는 오한 손기양(孫起陽) 선생과 함께 정한강(鄭寒岡), 장여헌(張旅軒) 선생 집에 드나들며 학문의 조예가 깊었다. 임진왜란 때 군대의 공이 있어 군기사부정(軍器寺副正)으로 내정하고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사회의 기강이 문란함을 걱정하여, 선현들의 예설(禮說)을 모아 주(註)를 달아서 가례(家禮) 3권을 펴내었는데 가례부췌(家禮附贅)라 한다. 또한 향안(鄕案)을 중수하여 고을의 풍속을 바로잡았다. 더욱 학업에 정진하여 동화음자해(東華音字解), 역리해명(易理解明)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글을 모은 문집 1권이 있다. 밀양군 초동면 금포리에 만년에 지어 사시던 오휴정(五休亭)이 있으며 이익(李瀷)이 찬(撰)한 갈명(碣銘)이 있다.
  • 자는 순경(舜卿). 호는 청(晴). 본관은 광주(廣州). 냉와(冷窩) 안경점(安景漸)의 현손이다. 자품(姿品)이 겸공(謙恭)하고 성도(性度)가 온아(溫雅)하여 안빈호학(安賓好學)하였으며, 효우(孝友)를 가정에 행하였고, 충신(忠信)을 향당(鄕堂)에 베풀어 세인(世人)들의 귀감(龜鑑)이 되니 지구가 평하기를 재조(才操)는 육경(六經)의 오의(奧義)를 발휘 하였고 행검(行檢)은 퇴속(頹俗)을 독후(篤厚)하게 하였다. 문집을 간행하여 서문은 안명언(安明彦)이 찬하고 갈명(喝銘)은 창산(昌山) 조규철(曺圭喆)이 찬하였다.
  • 조선 태종때(1401~1418)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안(安)씨. 이름은 엄경(淹慶). 호는 둔옹(遁翁). 광주안씨 삽포파(鈒浦派) 중조(中祖) 수(綏)의 6대손이고 청백리 안처선(安處善)의 아들이며, 그의 맏형 안여경(安余慶)은 지평감무(砥平監務), 경상관찰사(慶尙觀擦使), 이조참의(吏曺參議)를 지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충주목사(忠州牧使)·호조참판(戶曺參判)·공조판서(工曺判書)에 이르렀으며, 1417년 조선 태종때 감찰어사(監擦御使)로 있으면서 어사를 지낸 사람 19명과 총마계(總馬契)를 조직하고 그 서문을 지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께서 총마계첩(總馬契帖)에 시 3수를 실었다. 1452년 단종 계유정란 때 그의 사위 홍달손(洪達孫)이 협찬하니 그를 몰래 불러 꾸짖고 고향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하며 호를 둔옹(遁翁)이라 하고 화를 면하였다. 그의 동생 안완경(安完慶)은 충청도 관찰사로 쫓겨났다가 다시 양산에 유배되어 안평대군(安平大君) 용(瑢)과 더불어 적소(謫所)에서 죽음(賜死)을 당하였다. 둔옹(遁翁)은 그의 아들 안억수(安憶壽)와 더불어 밀양 삽포(鈒浦=부북면 전사포리 )로 옮겨 살면서 다시는 서울로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현재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에는 둔옹정(遁翁亭=강학소)이 현존해 오고 있다. 총마시(總馬詩) 점필재 김종직 지음. 남대(南坮=어사대) 깊은 곳에 세월이 오랜데 서물 넘는 사람들이 안행(雁行) 같구나 곧게 뻗어남은 응당 고백(古栢)에 참여할 듯 간사함 물리침은 마침내 신양(神羊=관원이 써던 모자)에 부끄러움이 없네. 의분(義分)에 이그러짐이 없음은 그전부터 알았지만 시정(詩情)에 격앙됨을 몇번 봉착했던가 날마다 함께 웃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인데 뒷날의 성쇠시(盛衰時)에도 서로 잊지 말게나둔옹
  • 조선 세종때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완경(完慶). 호는 정암(貞庵). 1423년(세종 5) 문과에 급제하여 1436년에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으로 있으면서 중시(重試)에 합격. 벼슬이 부제학(副提學)으로 올라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고 호당(湖堂-집현전 학사들의 글방)에 참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집현전 여러 학사들과 함께 고명(顧命-임금이 유언으로 뒷일을 부탁함)을 받았으며, 1453년(단종 1)에는 외임으로 쫓겨나 충청감사가 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인 뒤에 그 일당으로 지목하여 양산(梁山)에 귀양 가서 죽음(賜死)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이양(李穰), 민신(閔伸), 조극곤(趙克寬), 이경유(李耕柔) 등과 함께 다섯 영걸(英傑)이라 일컬어졌다. 1791년(정조 15)에 영월(寧越)의 정충단(貞忠壇)에서 부식제사를 받들게 되었다.
  •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유중(瑜重). 자는 국서(國瑞). 호는 만포(晩浦). 일찌기 과거공부를 하지 않고 숲속에서 독서하며 식견과 경륜을 넓히고 포용력을 기르되 출세를 원하지 아니하였다. 고향땅 마을에 서숙(書塾)을 창건하여 생도들을 교수하고 향교에서 강학하여 사림(士林)을 고동하니 한 고을이 스승이라 일컬었다. 우애가 두터워 맏형 성재공(省齋公) 묘 아래에 집을 지어 단연(壇然)이라 편액하여 수학과 수도에 전념하였다 모렴당(慕濂堂)을 중수하여 기문과 상량문을 지었고 문집 3권이 간행되었는데 성재(性齋) 허전(許傳)선생이 서문을 짓고,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가 발문을 쓰고, 만파(晩坡) 손종태(孫鍾泰)가 행장을 썼다. 1868년(고종 5) 11월 27일 세상을 떠나니 묘는 양산군 구황산(舊黃山) 안산(案山) 독록(獨麓) 갑좌(甲坐) 고을 사람들이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루니 긍재(肯齋) 참판(參判) 이돈우(李敦雨)가 묘갈(墓碣)을 지었다.
  • 조선 중종때의 학자.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인(忍). 호는 모렴당(慕濂堂). 광주 안씨 중조 시어사 안수(安綏)의 9대손이고 예안현감 안억수(安億壽)의 손자이고 만호(萬戶) 안여효(安汝孝)의 맏아들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숙부인 정암(貞庵)공이 안평대군과 더불어 양산 적소(謫所)에서 같이 화를 당한 뒤에 관직에서 사퇴하고 또 자손에게도 벼슬길에 오르지 말기를 경계 하였는데 그는 1507년(중종 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사림에 높은 명망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원대한 앞날을 기대하였으나 조부의 유훈을 받고 부터는 과거에 올라 벼슬하려는 생각을 아주 버렸다. 일찌기 천거를 받아 익찬(翊贊) 벼슬로 불렸으나 나가지 아니하였다. 삽포(부북면 사포리)마을에 숨어 살며 못을 파서 연(蓮)을 심고 못 가에다 정자를 지어서 모렴당(慕廉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는데 염계(灑溪) 주돈희(周敦희-송나라의 학자) 선생이 연을 좋아하던 뜻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가 조용히 앉아 태극도통서(太極圖通書)를 마음새겨 읽으면서 성리학의 다함없는 묘리를 연구하였는데 못의 물빛이 추녀와 뜰에 비치고 연꽃의 향기가 안석과 문간에 스며들어서 끝없는 풍월과 더불어 말없는 중에 주(周)선생과 합치하는 의사가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족형 태만(苔巒) 안구는 사간(司諫) 벼슬에 있다가 퇴직해 있었고, 복재(僕齋) 김유(金紐)는 점필재 선생의 손자인데 그와 더불어 이웃에 사는 벗이 되어 이야기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고을 선현을 일컬을때 반드시 그의 벗들을 한 시대의 첫째로 추천하였다. 그의 묘소는 밀양시 삼랑진읍 율동리에 있다.
  • 자는 태로(兌老). 호는 석하(石荷). 휘는 종덕(鍾悳). 본관은 광주(廣州). 냉와(冷窩) 안경점(安景漸)의 종현손(從玄孫)이다. 선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학문은 밀주(密州=밀양)에서 조선 500년 동안 점필재 뒤로는 처음이라는 세평이 있었다. 1842년(헌조 8) 진사시험에 올라 선혜랑(宣惠郞)을 거쳐 7군의 외직을 역임하였는데 임지마다 치적(治績)이 높았다. 1844년(헌종 10)에 나라의 정세가 크게 문란함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대책을 개진하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충첨의우(忠瞻義旴)에서 우러난 글이라 하였다. 같은 해 10월 전라도 순찰사로 특명을 받아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법으로 다스려 민폐를 근절하고 관기를 확립함으로써 세도를 징청(澄淸)할 뜻을 밝혔다. 그 뒤 사원(祠垣)을 관장하게 되어 조정 사명(辭命)의 문안은 모두 선생이 손수 쓴 것이 많았다. 만년에 지위와 덕망이 같이 높았는데 좌천으로 청송군수로 도임하여 별세하니 세상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선생은 밀주 근대의 학문과 명환으로서 큰 별이었다. 문집 7권을 남겼는데 행장(行狀)은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 찬하고 갈명(碣銘)은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찬하였다.
  • 자는 사초(士初). 호는 농서(農西). 오휴자(五休子) 안신의 후예. 그의 모습이 범상치 아니하고 재주가 고매하여 말을 배울 때부터 이미 글을 읽을 줄 알고 글의 이치가 명백하니 집안 아저씨인 석하공(石荷公)이 보고 장래가 촉망된다 하였다.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를 스승으로 섬기며 도호(陶湖)의 상전지결(相傳旨訣)을 들었고, 심재(深齋) 조경섭(曺競燮)·퇴수 이병곤(李炳鯤) 등과 도의로서 서로 사귀기를 언약하였다. 학문을 닦고 갈아 학덕이 세상 사람들의 추중을 받게 되었으니, 평하기를 진심순덕(眞心純德)이 근세에 드문 학유(學儒)이라 칭송하였으며 만년에는 많은 후진을 양성 하였다 한다. 문집이 전한다.
  • 본관은 광주(廣州). 이름은 희원(禧遠). 자는 길수(吉수). 호는 시헌(時軒).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이다. 언론이 빼어나고 기상이 너그러웠으며 조정에 나가거나 고향에 돌아와서도 중망이 쏠렸다.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선임 되었는데 그 뒤 성균관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대사간(大司諫),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부응교(副應敎), 통레원(通禮院) 좌통례(佐通禮)를 역임 하였으며, 1891년(고종 28)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사직하고 귀향 하였더니 1903년(광무 7)에 관찰사 박제흥(朴齊興)의 주천으로 비서원승겸장레원장례(秘書院丞兼掌禮院掌禮)를 제수하였다. 갑신정변 때 청나라 장수 원세개(元世凱)가 왕에게 독대(獨對)를 청하자 분개하여 진언하기를 "원의 공이 비록 중하지만 외국의 사신이고 신 등은 못났어도 시신인데 어찌 외신(外臣)과의 독대를 용납하겠습니까?" 하고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1909년에 능에 친히 제사 드릴때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으로서 집존(執尊)한 공로가 있어 옷 한벌을 하사받았다. 1918년에 병산서원(屛山書院) 원장에 피임되었다. 나라가 망하자 융희처사(隆熙處士)로 자처하며 두문불출 하더니 삽포(부북면 사포리)에 성호(星湖) 이익(李瀷) 선생의 전집(全集)을 간행하였다. 저서로는 시헌유고(時軒遺稿) 5권이 있다.
  • 밀양시에서 무안면으로 가는 길에 비각이 있다. 이것이 조선시대 인조대왕으로부터 부모 섬기기를 지극히 한 효자를 기리기 위하여 효자라는 정려를 내려 지은 어효자 비각이다. 조선 광해군 때 무안면 마흘리 어은동에는 벼슬을 마다하고 농사 일을 하는 어씨 가족이 살고 있었다. 비록 가난하게 살고 있었으나 부모님을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시어이웃 마을에서도 소문이 높이 나서 칭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부친이 중병으로 앓게 되자 어씨는 험준한 산계곡을 누벼 약초를 캐어 달여드리기도 하고 유명하다는 의원들을 찾아 약을 지어 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부친 병을 고치기에 온갖 정성을 다 하여도 차도가 없어 근심을 하던 중 하루는 우연히 지나는 길손이 그 병에는 잉어가 제일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때는 겨울이라 얼음이 얼어 잉어 잡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무안면 일대의 강과 연못을 다 뒤졌으나 잉어를 잡지 못하였다. 어씨는 자기 정성이 부족하여 잉어를 구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점동 뒷 산에 있는 조그만 못에 가서 밤을 세워 하늘을 바라보며 "부친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잉어를 잡게 해 주셔요" 하고 정성으로 기도를 드린 후, 얼음을 깨고 보니 하늘의 도움인지 큰 잉어 한마리가 은빛 비늘을 번쩍이고 있었다. 어씨는 이 잉어를 정성들여 고아 부친에게 봉양하니 과연 부친의 병환은 씻은 듯이 가시었다. 그 후, 부친께서 장수하시다 별세하자 어씨는 3년 동안 술과 고기를 금하고 묘소를 살피며 애통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했다. 이러한 어씨의 부친을 향한 지극한 효성이 널리 퍼져 인조대왕께서 효자라는 정려를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마흘리 어은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효자 어씨가 살았다는 뜻으로 불리게 되었고 잉어를 잡은 못이 있는 골짜기를 잉어 골짜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어씨의 이러한 효행은 길이 후세를 향해 전해가고 있으며, 오랜 세월로 정려각이 훼손 된 것을 마을 유지들의 주선으로 보수되었다.
  • 초동면 구령리에서 입밀양(入密陽) 선조 우경(禹瓊)의 7대손으로 태어났다. 자는 명신(明新). 호는 구강(龜岡). 본관은 단양(丹陽). 그는 하늘이 밝힌 효도가 있어 그 어릴때 아버지 상을 당하여 과도하게 슬퍼하니 인근 사람들이 효성이 놀랍다고 칭송하였다. 제사날에는 애타게 울부짖음이 타의 귀감이 되었다. 어머니를 봉양함에 있어 고기잡고 나무하여 효행이 동주(董廚)와 같았다. 어머니께서 우는 것을 좋아하면 울기도 하고 웃는 것을 좋아하면 웃기도 하며, 새끼를 희롱하는 것 같이 하여 그 어머니를 즐겁게 하였으며, 매일 시탕함에 있어서 어떻게 하면 약효가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어머니께서 새로운 위병으로 고생 하시자 똥을 맛보고 병을 감지하며 그 병을 자기가 대신하기를 원하여 하늘에 빌어서 여러번 명이 회생하고 어머니 나이 80세까지 살았다가 별세하였다. 상례는 자기 스스로 한 것이 옛 현조자와 같이 하였고 아침 저녁으로 성묘하며 시묘살이 3년 동안 밤낮으로 통곡하고, 탁자 하나를 묘소 밑에 놓고, 눈물 뿌리는 곳에는 풀이 다 말랐으며, 한 줄기 맑은 샘이 묘소 앞에서 솟아났다. 그때 제기 그릇과 눈 언저리를 씻고, 여막 가운데에는 상제에 관한 책만 있었다. 위문록 가운데는 기록된 사람이 한 고을의 현사들의 기록 뿐만 아니라 대개 서울의 많은 명사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평소에 친한 인사들이다. 시묘살이 3년 뒤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마른 풀이 다시 살고 샘물이 스스로 맑아졌다. 자기의 효행이 하늘에 이르렀고 신을 감동케한 것이다. 이와같이 우창주의 효행이 높고 이상하다 하여 특히 정여전을 베푸시는 것이 풍속을 심는 정사로써 은전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하고 경상도내 유생(幼生) 박한승(朴漢承) 외 17인이 1891년(고종 28) 9월에 밀양 부사와 경상도 관찰사 앞으로 건의하여 조정에 보고하니 예조에서 입안된 것을 부승지 이용선(李容善)이 임금께 상주하여 윤허를 받아 정문(旌門)을 세울 것을 명하여 제목과 장수(匠手)는 관에서 스스로 주선토록 하였으나 당시의 국내 사정으로 보류되었다가 1911년에 밀양시 초동면 구령동 마을 앞에 인근 사람들의 주선으로 정여각(旌閭閣)을 세웠다.
  • 이씨부인은 벽진(碧珍) 이성일씨의 외동딸로 밀양시 무안면 내진리에서 태어나서 나이 16세에 상동면 금산리 순천(順天) 박태동과 결혼하였다. 결혼 뒤 얼마 아니되어 남편 박씨가 병석에 신음하게 되자 부인은 남편의 용변을 받아내는 등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보람도 헛되이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청상 과부가 된 이씨부인은 절개를 굳게 지키면서 남편의 뒤를 따라 죽겠다는 심정에서도 시부모님을 봉양하여야 한다는 효심에서 자결과 재혼도 하지않고 시부모님 별세후 3년상을 마치고 남편을 사별한 뒤 10년만에 자결하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시부모님에게는 효부요, 남편에게는 열녀라 하였다. 1907년 밀양시 상동면 금산리 727번지에 고을에서 효열각을 세워 그를 추모하였다.
  • 벽진장군 이총언의 10세손으로 자는 직경(直卿). 호는 국헌(國軒). 호는 문안(文安).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왕조에 이르기 까지 벼슬이 통헌대부 민부상서 진현관 대제학(通憲大夫民部尙書進賢館大提學)으로 충숙왕 4년 정월에 원나라 사신으로 상주객관(현강소성 무진)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읊은 시가 유명한 두우시(杜宇詩)이다. "제재산화제기층(啼在山花第機層)"이란 명구를 들은 중국의 천자가 합로(閤老)에게 명하여 화운(和韻)을 지어 칭송함과 아울러 칭호를 산화(山花) 선생이라 하였다.
  • 휘는 계철(啓哲). 자는 원중(元重). 호는 겸헌(謙軒). 본관은 함평(咸平). 효자 종모당 이영헌(李令憲)의 아드님이다. 어릴 때부터 엄한 부친 훈계를 받고 지극한 효성을 이어받아 효성을 다함을 삶의 보람이요, 목적으로 삼아 한 평생을 정진하셨다. 아버님이 신병으로 수년간 누워 계실때, 좋아하시는 추어탕을 끓여 드리려고 가운데 못을 파고 미꾸라지를 길러, 쪄서 말린 고기를 간수하여 일년 내내 추어탕이 끊길 날이 없었으며, 한일합방 뒤 아버님이 좋아 하시는 담배를 즐기시도록 4형제분이 모두 담배를 끊고 아버님을 모셨다 한다. 아버님을 여의신 뒤 3년 동안 하루도 쉬지않고 성묘길을 다녔는데, 15리 길을 하루도 빠지지 않는 그 정성에 감동하여 폭설이 내리는 추운 겨울이나 폭우에 산길이 씻겨 떨어지면 마을 사람들이 자진하여 길을 보수하여 주었다 한다. 또한 늦게 어머님께서 눈병이 나서 10수년간 앞을 보지 못하시자 선생는 몸소 어머님의 눈이 되어 집안의 모든 일을 낱낱이 의논 드리고, 하루 3끼 밥상을 손수 떠 먹이시니, 그 아버지의 효행이 아들에게 전해지고 그 아들의 효행이 온 고을에 번져서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각계 각층의 칭송과 표창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선대의 효행이 후세를 살아가는 자손들의 좌우명으로 살아 숨쉬고 있음을 우리는 지켜보고 본 받아야 할 것이다.
  • 근세 손가락을 끊어서 부모님께 수혈한 효자. 자는 서삼(瑞三). 호는 만오(晩悟). 본관은 함평(咸平). 고종 27년 부북면 퇴로리에서 호군(護軍) 이선지(李先智)의 10세손으로 태어났다. 의표가 단정하고 지상(志尙)이 고결하여 어릴 때부터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는 놀지 않고 항상 어른들을 따랐다. 나이 10세에 언어 율동이 예의 법도에 어긋남이 없고, 비록 체구는 약소하였으나 인품이 출중하여 지덕(智德)을 모두 갖추었다. 특히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님의 가르침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일찍부터 아침저녁 부모님께 드리는 문안은 시종 하나 같았으며, 하루 세끼 식사때마다 부모님 곁을 떠날 줄 모르고 식사를 마친 뒤에 물러 나오기를 평생을 두고 한끼도 빠지지 않았다. 어느날 그의 어머님이 병을 얻어 아들의 정성어린 보살핌도 소용없이 병세가 위중하여 음식을 전폐하니 자식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라 한탄하며 그도 음식을 끊고 3시 시탕에 안색이 수척하거늘, 아들의 지극한 효성에 감심한 그의 아버지가 침식을 권하니 "어머님께서 식음을 모르시고 병석에 누워 계신지 며칠 되온데 어찌 소자가 음식을 생각하오리까." 하였다. 1920년 8월 돌림병이 전국에 만연하여 아버지마저 중태에 빠지고 어머니는 의식을 잃게 되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하였으나 차도가 없던 차에 아버지 마저 병세가 위중해 지자 통곡하며 스스로 손가락을 끊어 수혈하니 어머니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아버지는 3일간 소생하였다. 부모님 병환에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한 효자는 흔히 보아왔으나 하루에 두번씩이나 입으로 끊고도 아픔을 모른 체 부모님 상을 당하고 3년상을 치루는 동안 예절을 따라 시묘살이에 정성을 다하니 밤마다 범이 나와 선생께서 시묘하는 부근과 왕래하는 길을 지켜주었다. 이와같은 효행이 집안과 마을에 널리 퍼져 향회(鄕會)에서 정려를 내려줄 것을 추천하려 하였으나 이를 반대하시면서 "사람의 자식된 도리를 당연히 하였을 뿐인데 보상은 있을 수 없다. 효를 추천하는 사람은 누구며, 또한 효로 상을 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서 끝내 사양하였다. 향년 85세로 세상을 떠나니 선생은 "효자 중의 효자"라 세상 사람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 두문동의 이사지(李思之)는 중조 대제학 이견간의 현손이며 처음 밀양에 오게 된 이식(李軾)은 증조로서 직함은 중랑장(中郞將)이고 호는 여은(麗隱)이다. 일찌기 과거에 올라 공양왕 때에 중랑장으로 재직하였는데 고려 왕권이 이태조에게 선위함을 보고 관악산에 들어가 기우자(騎牛子), 도은(陶隱), 목은(牧隱) 등 여러 선생과 뜻을 같이 하여 시문을 쓰고 읊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 뒤 이태조가 불렀으나 끝까지 사양하였다.
  • 조선 광해군 때의 절의신(節義臣). 자는 명원(明遠). 휘는 선지(先智). 본관은 함평(咸平). 벼슬은 통정호군(通政護軍)을 지냈으며, 처음 밀양에 살게 된 함평이씨의 입향조(入鄕祖). 조선 선조 9년에 통덕랑(通德郞) 이지경(李止敬)의 아들로 태어났다. 날때부터 그 모습이 넓고 우대해 보였으며, 품성이 돈독하고 효행이 지극하여 아버지를 모시지 못한 설음이 간절하고 홀어머니를 섬김에 사랑과 존경을 다하여 순종하고 받들기를 극진히 하였다. 자라나서는 집안의 명예를 이을 큰 뜻을 품고 무예를 닦아 1603년(선조 36)에 과거에 올라 1610년(광해군 2)에 어모장군 선전관(禦侮將軍宣傳官)이 되고, 1611년(광해군 2)에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에 올라, 1614년(광해군 6) 가을에 절충장군 용양위 상호군을 거쳐 중추부사 첨지통정대부(中樞府事僉知通政大夫) 정 3품 당상관(正三品堂上官)에 오르자 서궁의 비변이 일어나니(영창대군 살해, 폐모), 그의 큰아버지 판서공 이지효(李止孝)는 상소를 올려 항직(抗直)하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옥에 갇힌 7일 만에 머리를 부수고 피를 토하며 장열하게 서거하였다. 그는 이날의 충분(忠憤)을 금하지 못하고 "국모가 없는 나라의 녹을 먹느니 고향에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리라." 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사생(死生)과 출처(出處)를 백일같이 밝힌 것이다. 선생께서는 대범하게 칼날을 밟으면서 인(仁)을 이루고, 벼슬을 사양하면서 의(義)를 지켰으니 한 집안에 인의(仁義)를 갖추어 백세의 사표가 되었다. 충의(忠義), 이 두 글자는 지극히 크고 강하며 벽력이 진동하는 위엄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화복(禍福)의 사이에 처해도 움직이지 않으니 이는 어떠한 것으로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그 뒤 나라에서 선생의 충의를 기용하기 위하여 벼슬을 주어 여러번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고 세상과 인연을 끊으니 후세의 사람들이 선생의 충효를 경모하여 마을 이름을 오산(鼇山), 월례(月禮)에서 오례(五禮)로 고쳤다 한다. 밀양시 부북면 오례리에서 선생의 유덕을 기리는 의첨재(依瞻齋)가 있다.
  • 직함은 사복부정 정국공신 성산군(司僕副正靖國功臣星山君)이다.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 관향은 벽진(碧珍)이다. 시조 벽진 장군 이총언의 17세손으로 성품이 맑고 문무에 재능이 뛰어나 20년 전의 소년시절에도 세상이 문란하고 부조리함을 탄식하고 급장(及長)으로 호방관(虎榜官) 훈련부정(訓鍊副正)에 등과하여 재직중 홍치(弘治), 갑자(甲子), 을축(乙丑), 양년(1504~1505)에 연산군의 음학이 날로 심하여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있고 국가의 정세가 위태로움을 보고 내 한 몸이 희생되더라도 바로 잡아 보겠다는 결심으로 중종 원년(1506) 9월 2일에 박원종(朴元宗)과 함께 거사하여 연산군은 폐위되고 중종대왕이 즉위 하였다. 따라서 신부인(愼夫人)을 왕비로 삼으니 정국훈(靖國勳) 107인 중 제 26순위에 성산군(星山君)으로 봉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백관이 협찬 결장한 3일만에 연산조 신수근(愼守勤)의 딸이 왕비에 부적당하다 하여 조정의 권세 욕구자들로 부터 다시 의론됨으로 관직을 버릴 뜻을 밝히고 충암 김정(沖庵金淨)·눌세 박상(訥齊朴祥)이 힘을 합하여 왕비 복의(復議)가 부적당함을 항소 하였다. 그 뒤 중종 14년 기묘(1591)에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으로부터 공신훈(功臣勳)을 뺏으려 함에 헌장(憲長) 조광조(趙光祖)가 중종께 개의(改意)는 부당하다는 것을 간곡히 고하였다. 시이부정(始以副正)으로 정국훈봉군(靖國勳封君)으로 하고 통정(通政) 가선(嘉善)에 까지 올랐으나 신비(愼妃), 폐비에는 반대하였으며 관직을 버리고 영남으로 내려와 밀양에 들러 무안면 내진리에 세거지를 정하였다. 그 뒤 중종대왕께서 초동면 곡강(曲江)을 사패(賜牌)하고 사찬문(賜贊文)에 가전청백(家傳淸白)하고 세수충근(世守忠勤)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사패지에서 두문불출하고 은거하면서 소일하고 있던 중 얼마되지 아니하여 조정에 변화가 있었으니 벼슬을 버리고 용퇴한 것이 명철한 보신이 된 것이다.
  • 호는 계헌(溪軒). 휘는 신(申). 본관은 재령(載寧). 벼슬을 거듭하여 사헌지평(司憲持平)에 이르렀다. 아버지 상중(喪中)에 있어서는 밤에 허리띠를 풀지 않고 애통하여 쇠약해져서 뼈가 드러났다. 모든 상구(喪具)는 여러 형제와 힘을 모아 갖추지 않고, 손수 혼자서 장사를 부담하고 여묘(廬墓)살이 3년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나라에서 정려하였다. 밀양시 하남읍 남전리 마을 입구에 "효자 이신의 여(孝子李申之閭)"가 있다.
  • 휘는 영헌(令憲). 자는 의백(宜伯). 호는 종모당(終慕堂). 본관은 함평(咸平). 부북면 퇴로리에서 선비 이민겸(李敏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나이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는 정성이 지극하였다. 가세가 가난한 중에 어느해 흉년이 들었는데 노환으로 병석에 눕게된 어머님이 걱정 하실까봐 쌓아 둔 곡식을 전부 내려놓고 손수 한 말, 두 말 하고 큰 소리로 외쳐서 어머님 마음을 편하게 해 드렸다 한다. 어머님의 상을 당하여는 죽을 끓여 잡수시며, 바람부는 아침이나, 비내리는 저녁, 단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성묘를 다니면서 슬피우는 소리는 산천을 감동케 하였다. 3년상이 지난 뒤에도 매월 삭망 때 마다 성묘를 거르지 않았는데, 그때마다 집에 기르는 개가 따라 다녔으며, 해가 지고 어두워 지면 산속의 범이 반드시 호위 하였다 한다. 묘 앞에는 훤초꽃이 피었는데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점차 말라죽고 없어지니 이 또한 하늘이 선생의 효심에 감응한 증거라 한다. 선생께서 집에서 묘소까지 10리길을 3년동안 다니면서 새 길이 생겼는데 이 길을 마을 사람들은 "효자로"라 부른다. 마을 앞 동구 밖에 선생의 효심을 기리기 위한 정려각을 향토 유림에서 세웠는데 지금의 부북면 춘화리 봉계동에 있다.
  • 휘는 원보(元輔). 본관은 강양(江陽). 증직(贈職)은 동몽교관(童蒙敎官). 숙종 23년에 창녕군 영산면 도산북리에서 동추공(同樞公) 이광일(李光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여 주위 사람들로 부터 칭송을 받아왔다. 8세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가슴을 두드리고 통곡하였더니 그 장례에 있어서 천광 가운데에 기어 들어가서 어머니를 따르려 하니 보는 사람 모두들 눈물을 흘리고 말리니 이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동증자(童曾子)라고 불렀다. 그의 아버지를 봉양함에 있어서는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갖추고 좌우에서 살피며, 잠깐이라도 옆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집이 몹시 가난하여 나물밥도 잇지 못하되 아버님에게 드리는 맛있는 음식은 떨우지 않았다. 아버지가 일찍 홀아비로 있으니 어떤 사람이 첩을 하나 얻으라고 권하자 그는 웃으며 말하되 "자식이 이와같이 나를 봉양함이 지극하니 어찌 첩을 얻으리오" 하였다. 노환으로 아버지 병세가 위독함에 그가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드려 7일간의 명을 연장시키고 별세함에 애통해하며, 정성껏 조심하여 장례 지내고 묘소 곁에 시묘 살이 3년을 하고 조석으로 슬피 곡하고 성묘하였다. 복제를 마쳐도 슬픈 마음을 잊지 못하여 차마 귀가하지 못하고 또 1년을 더 살았다. 시묘사는 과정에서 한번은 큰 비가 내려서 개울이 갑자기 불어나 산이 무너질 지경이라 그가 묘소를 지키며 부르짓고 통곡하니 비가 그치고 물이 스스로 물러 나갔다. 겨울 한때는 눈이 쌓여 산에 가득 차되 그가 절하고 곡하는 곳에는 쓸지 않아도 눈이 녹았고, 밤이면 신령한 빛이 여막 가운데 밝았고, 또 호랑이 두마리가 가까이 와서 순하게 보호하니 이것이 모두 효성이 지극한 소치였다. 그는 신병으로 정종 원년(1777)에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에서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다. 1793년(정종 17)에 경상도 관찰사 정존중(鄭存中)이 이원보의 효행을 나라에 상주하니 1794년(정종 18)에 정문(旌門)을 명하고 호세(戶稅)를 면세토록 하였다. 1809년(순조 9)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그의 효자각은 부북면 연포마을 길가에 세워져 있다.
  • 자는 운익(雲翼). 휘는 유룡(儒龍). 본관은 함평. 벼슬은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정조 13년 밀양군 부북면 퇴로리에서 근산(近山) 이승운(李承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상이 강개하고 무예가 뛰어나 1819년(순조 19)에 과거에 오르니 조정에서는 무예청(武藝廳)을 신설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할 즈음에 탁월한 그의 지혜와 용기며 무예에 탄복한 중신들은 그를 훈련원 첨정(訓練院僉正)으로 추천하여 배명되었다. 이때에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 그 여파가 진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진주진관 남해병마절제도위 겸 남해현감(晋州鎭管南海兵馬節制都尉兼南海縣監)에 명을 받아 많은 전공을 세우는 한편 적의 기밀을 탐지하여 적의 괴수 여러 사람을 사로잡고 또한 쏴 죽이니 그의 명성이 조야에 크게 떨쳤다. 1825년(순조 25)에 절충장군 훈련원도감 용양위로 승진하고 같은 해 11월에 중추부사 첨지 겸 오위장(中樞府事僉知兼五衛將)을 겸임하고, 1834년(순조 34)에 통정대부 여산도호부사(通政大夫礪山都護府事)로 승진하고, 1835년(헌종 1)에 사복장(司僕將)을 겸직하였다. 그 뒤 1840년(헌종 6)에 왜선(倭船) 몇척이 백령진(白翎鎭) 근해상에 출몰하자 임금은 중신들에게 적선을 즉각 격퇴하고 국방에 만전을 다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중신들은 공을 즉시 불러 백령진 수군첨절제사(白翎鎭水軍僉節制使)로 추천하는 동시에 공주진 우영 토포사 및 장연감목관(公州鎭右營討捕史兼長淵監牧官)을 제수 하였다. 그뒤 원주진관 횡성병마절제도위 겸 중영장 토포사(原州鎭管橫城兵馬節制都尉兼中營將討捕使)에 명을 받고 횡성현감(橫城縣監)을 겸임 하였으며, 1850년(철종 원년)에는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을 제수하니 벼슬에 머무른 지 27년간 문·무를 겸하여 지키고 다듬고 가꾸는 유훈을 남겼다.
  • 휘는 유봉(儒鳳). 본관은 함평. 벼슬은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使兼五衛將). 조선 정조 18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서 호군(護軍) 이선지(李先智)의 7대손으로 태어났다. 1821년(순조 21) 28세때 무과에 급제하니 당시에 뽑힌사람 40인 중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832년(순조 32)에 선략장군 행 용양위 부사과를 거쳐 1842년(현종 8) 3월에 어모장군 행 훈련원 첨정(禦侮將竹行訓練院僉正)·8월에 통훈대부 행 진도군수(通訓大夫行珍島郡守)를 제수하여 장흥진관(長興鎭管) 진도동첨 절제사(珍島同僉節制使)를 겸임하였다. 1845년(헌종 11)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다시 진도군수에 부임하자 2년에 걸친 큰 흉년을 당하여 백성들이 기아와 질병에 신음함을 크게 슬퍼하여 녹봉과 사재를 털어 수많은 인명을 구출하는 한편 군민들로 하여금 불모지를 개척하여 소득을 증대하는 어농병행책(漁農幷行策)을 장려하고, 나아가 몽매한 군민들의 자제교육을 위하여 서당을 짓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 대한 책을 펴내어 군민들을 깨우쳤다. 선생의 이와같이 맑은 덕을 기리어 군민들이 "쇠" 와 "돌"로써 군내 곳곳에 선정비를 세워 선생의 유덕을 사모하였으나 쇠로 만든 철비(鐵碑)는 왜정시대에 공출로 뽑혀가고 돌로써 만든 비석은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에 남아있다. 나라에서는 선생의 치적을 높이 찬양하여 1845년 12월에 절충장군 행 용양위 부호군 겸 진주진 우영장 및 토포사로 승진하고 아울어 유서를 내렸다. 1846년(헌종 12)에 부호군 겸 오위장(副護軍兼五衛將)을 제수받고, 12월에 절충장군 첨지 중추부사 겸 오위장(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 임명되어 군기를 확립하고위풍을 진작하였다. 불행히도 재임중 과로로 인해 향연 56세로 세상을 떠나니 청백리로서 선생의 치적을 높이 평하여 사간(司諫)으로 하여금 서둘러서 고향인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까지 반장(返葬)케 하였다.
  • 자는 성춘(聖春). 호는 유와(幽窩). 휘는 유붕(儒鵬). 본관은 함평(咸平). 정조 10년에 밀양군 부북면 퇴로리에서 대현(大賢) 이승윤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천자(天資)가 총명하여 나이 7세에 소학(小學)을 읽고 10세에 四書三經을 두루 읽고 20세에 문장가요 명필이 되어 1802년(순조 2)에 성균관 석사 학위를 획득하였다. 다음해에 대과에 응시하여 낙방하고 유연히 탄식하기를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비록 입신양명의 길이라 하지만 과거에 오르기 위하여 청춘을 허송한다는 것은 실로 무의미 하다. 차라리 선세의 유업(儒業)을 이어받아 후진을 길러 나라에 헌신하는 것이 유일한 충효의 길이다."하고 퇴로정(退老亭)에 서실을 증축하는 한편 강규(講規)를 정하고 문회(文會)를 설치하니 공의 문명(文名)이 일시에 울연하였다. 이와 같이 선비, 벗들과 더불어 심경(心經) 근사록 등을 연마하며 뜻을 기리고 학문에 몰두하며 세상의 영욕(榮辱)을 뜬 구름에 붙였다. 선생의 지조와 행실은 종일 단정히 앉아있어도 의관이 정연하고, 종일 글을 읽어도 게으르지 아니하고 이치에 밝았다. 특히 성현을 사모하고 조선을 위하는 성심이 탁월하여 천금의 가산을 조선을 섬기는 일에 다 바치고, 만권의 책을 후진을 위해 아까워 않았으니 문앞에는 언제나 의관(衣冠)이 끊이지 않고 앉은 곳에는 항상 화목한 기운이 충만하니 세상 사람들이 유와(幽窩)선생으로 추중(推重)한 것이 선생의 호로 불리우게 되었다. 질병을 얻어 병석에 신임하자 원근의 친지들의 위문이 매일 수십명에 달하였으나 선생은 한시라도 의관을 벗지 아니하고 몸을 움직임에는 추호도 예절에 어긋남이 없었다. 돌아가시던 날 일찍 일어나 목욕하고 좌우명을 암송한 뒤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어제밤 돌아가는 꿈을 꾸었다. 생사가 명에 달렸으니 어찌 하늘의 뜻을 거역하리오. 대저 마음을 가진자는 한 몸의 주인으로서는 만사에 응함이니 마음의 기둥이 바르면 일신에 하자가 없나니 모든 일에 먼저 내 마음에 있는지 여부를 살피고 사물에 응하면 비록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큰 허물은 없을 것이니 부디 의로운 글뜻을 익히기에 힘써서, 성현의 말씀을 믿고 존중하며 경학에 마음을 두고 깊이 연구하면 뒷날 크게 깨닫게 될 것이니 부디 행동을 삼가하고 삼가하라"하고 쾌연히 서거하셨다. 사림(士林)에서 장례를 치루니 만제(挽祭)가 500여에 달했다.
  • 밀양에서 살게 된 이식(李軾)의 자손이 누대로 향안(鄕案)에 들게 된 분이 24위 였으며 모두가 다 학자였다. 그 중 성산군의 5대손 이장(李樟) 6형제는 그 조부 시하에 있으면서 학문이 돈독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이수하여 고을 안에서 5현자(五賢子)라 일컬었으며 특히 이장의 동생 이두(李杜)는 자가 사직(士直)이요, 호는 남회당이다. 부모의 공양과 여러 형제들의 우애를 받아 학문과 우애가 두터웠으며, 평소에 부형을 사모함이 지극하여 양친상에 6년간이나 시묘 하였으며 문장과 도덕이 다른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으므로 만인의 흠앙을 받았다. 품행은 청수고절(淸修苦節)하고 영여옥설(營如玉雪)이라 하였다. 남회당 선생이 평일에 살던 마을 이름을 지금도 효우촌(孝友村)이라 한다. 저서로는 남회당집 2권이 있다. 그의 학문과 유지를 계승하여 아들 명기(命夔)는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호는 청옹(聽翁), 손자 의한(宜翰)은 호가 자운옹(紫雲翁)이다. 증손 원광은 호가 문청자(文淸子)이고 현손 종검(宗儉)은 호가 남리옹(南理翁)으로 이 5대가 문한가(文翰家)로 칭송되었다.
  • 자는 능백(能伯). 호는 항재(恒齋) 또는 서고산인(西皐散人). 휘는 익구(翊九). 본관은 여주(驪州). 조선 헌종 4년 밀양시 용평동에서 도원공(挑源公) 이종극(李鍾極)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성품과 행실이 고매하고 학문이 넓고 깊었으며 경세(經世)의 기국(器局)을 갖추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여 포부를 펴지 못했다. 1890년 밀양군 부북면 퇴로리에 이사한 뒤 효우(孝友)로 한 문중을 다스리는 한편 마을을 위해서는 동약(洞約)과 학계(學契)를 만들었고 이창(里倉)을 설치하여 휼민(恤民)에도 전념하였다. 1890년 화산의숙(華山義塾)을 세워 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신교육을 도입하였으나 1910년에 국치(國恥)를 당하자 개연히 세상일을 단념하고 두문불출하였다. 저서로는 속우모록(續寓慕錄) 1권, 항재집(恒齋集) 5권, 독사차기(讀史箚記) 4권이 있다.
  • 본관은 함평(咸平). 이름은 지헌(志憲). 자는 만첨(萬瞻). 호는 송애(松厓). 조선 헌종 6년 1월 23일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업에 독실하여 학용품을 살 때에는 값을 다투지 아니하였다. 12세에 어머님 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지극하였으며, 계모를 맞이하여서도 생모와 같이 극진히 공경을 다하니 세상사람들이 진실로 학자의 돈독한 행실이라 칭송하였다. 80세의 아버님이 집에 계심에 성심을 다하여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잠시라도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더울때는 부채로서 서늘하게 하고 차울때는 몸으로 침구를 따스하게 하며, 침식과 기거를 반드시 살펴서 조금도 방심함이 없고 혹시 밖에 나갈때는 잠시 돌아오되 고기와 과실을 구해오고 언제나 맛난 음식물을 준비해 두었다. 항시 가족에게 훈계 하기를 "부디 몸가짐을 조심하여 처세를 엷은 얼음판 밟듯 전전긍긍하라. 특히 골육은 한 기운이 연한 한 몸이니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할지라. 사소한 이해로서 그 천륜(天倫)에 이르는 정을 멀리 하리오. 내 몸을 형제로 보고 형제를 내몸으로 보면 스스로 우애가 생기리라." 하였다. 1898년 3월 12일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에서 향연 59세로 세상을 떠나니 그의 일생을 형제간에 같이 자고, 같이 먹으며 근심과 즐거움을 같이 하였고 여러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였으며 종족간에는 미흡함이 있더라도 정이 변함이 없었으며 말은 바르게 하되 기품이 있었고 언제나 남을 용서하되 어진 사람을 사귀어 배우기를 싫어하지 아니하였다. 비록 자연에 숨어 산 백면서생이나마 나라를 사랑하고 도(道)를 근심하는 정의감과 강개심이 탁월하였다. 이와같이 효우 학문이 깊고 또한 덕망이 날로 높아 일대의 유풍(儒風)을 떨쳤으니 그의 마음을 다스리고 성품을 기르는 행실과 도(道)를 구하는 학문은 그가 남긴 문집(松厓集)에 소상하게 전해오고 있다.
  • 신라말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지도자로서 벽진장군이다. 신라 47대 헌안왕 2년(858) 벽진(碧珍) 가야(伽倻) 수촌(樹村)에서 태어났다. 신라말에 벽진태수로 있을 때 사방에서 도적의 무리들이 창궐하였으나 성(城)을 굳게 지키고 있으니 백성들이 태평하여 그 신뢰가 높았다 한다. 고려 태조가 사람을 보내어 화난(禍亂)의 진압 평정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하였으니 민심이 새로운 왕조에 향함을 살피고 태조 왕건을 도왔다. 태조 왕건은 이총언을 벽진장군(碧珍將軍)으로 제수함과 동시에 곡식과 소금 수천 석을 내려주니 감격하여 군대를 단결시키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그때 벽진(碧珍=지금의 경북 성주)은 신라와 백제 사이의 요충이었는데 장군이 진압한 공훈으로 고려의 최고 벼슬인 삼중대광 고려개국원훈 벽진장군(三重大匡高麗開國元勳碧珍將軍)에 봉하였다. 그 뒤 고려 태조 21년(938)에 서거하니 향년 81세였다.
  • 자는 중예(仲豫) 호는 월연주인(月淵主人) 또는 금서자(琴書子). 벼슬은 춘추관 편수관, 경연 시독관을 지낸 조선 중종 때의 문관이며 학자. 본관은 여주. 고려말 두문동 72현의 한분으로 충절과 문행을 떨친 기우자 이행(李行)의 5대손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499년(연산 5) 선생의 나이 17세때 부모님을 뫼시고 외가인 밀양으로 내려와 사인당리(지금의 밀양시 용평동)에 삶의 터전을 잡았으며, 1507년(중종 2) 25세때 생원, 진사 2과에 동시에 합격이 되었다. 1509년(중종4) 27세때 문과에 급제 함으로써 벼슬길에 나아가 예문관의 검열, 시교, 봉교 등으로 한림(翰林)을 역임하는 동안 직필하는 사관(史官)으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512년(중종 7) 30세때 사필(史筆)을 고치라는 권력에 맞서서 싸우다가 면직된 뒤로는 당대의 석학인 모재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 드나들며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35세때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복직된 뒤 사간원 정언, 사헌부 감찰 등으로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왕도정치에 적극 협조하였다. 1519년(중종 14) 37세때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에서 함경도사(咸鏡都事)로 좌천된 것을 기화로 훈구파와 신진사류간의 정쟁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다시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으며, 월연(月淵)가에 집을 지어 쌍경당(雙鏡堂)이라 편액하여 학문을 닦고 시를 지으며 지냈다. 이후 약 5년간을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를 비롯하여 이현보(李賢輔), 권벌(權筏), 김세필(金世弼), 류관(柳灌), 어득강(魚得江), 신광한(申光漢)승문원 교검(承文院校儉)으로 복직하여 평안도사(平安都事), 풍기군수(豊基郡守),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복직하여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을 역임하였다. 1532년(중종 27) 50세때, 홍문관 응교로서 당시의 권력자인 김안노(金安老)의 전횡을 규탄하다가 도리어 박해를 받아 관직을 사퇴하고 월연 별서(別墅)에 귀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후세 사람들이 기묘완인(己卯完人)이라 일컬으며 출세의 의리가 분명하고 정쟁에 휩쓸리지 않는 깨끗한 지조와 절의를 기리었다. 평생에 뒷산과 사선성(謝宣城)의 시율(詩律)을 좋아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고 주역(周易)의 정몽(正蒙)에 대한 세론(細論)을 편저(編著), 저서 월연집(月淵集) 1권이 있다.
  • 1544년(중종39)~1610년(광해군2). 속성은 임씨(任氏). 이름은 유정 또는 응규. 자는 이환. 호는 종봉,송운,사명. 경전을 읽다가 13세에 문득 출가하여 직지사 신묵화상(信默和尙)에게 가서 승려가 되었다. 명종때 선과(禪科)에 합격. 이후 시문의 명성이 높아 경중(京中)의 사대부들과도 많이 교류하였다. 선종 각사(各寺)의 주지를 사양하고 묘향산에 가서 서산대사의 문인이 되어 정진하고 그 정법을 얻었다. 선조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강산에 있던 그는 고성의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을 타일러 무고한 살인을 금지시킴으로써 영동 9군을 구하였다. 이어서 체제사(體祭使)의 관문과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일으켰다. 이후 평양성의 수복전에서 시작하여 적의 남하에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각지를 전전하면서 혹은 왜적을 직접 격파하고 혹은 아군의 군량과 궁실(弓失)을 조달하며 혹은 각지의 산성을 쌓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서산대사가 노쇄하였으므로 왜란의 전기간을 통하여 승병을 총령하였다 .왜란이 끝나자 일반 사대부들은 꺼려하던 일본에 국서를 받들고 건너가서 관백을 만나 임시 강화를 맺고 포로되어 간 조선인 3,500명을 데리고 나왔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되었으며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이다. 사명대사는 그 장년기를 병마의 풍진속에서 보내어 법문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고 또한 기회 있을 때마다 귀산하기를 청하였으나 국사로 인하여 조정으로부터 윤허(允許)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 전기에 선(禪), 교(敎) 양종을 통합하여 조계종으로 일원화한 서산대사의 사대문제(四大門第) 가운데의 수문(首門)으로서, 송운파(松雲派)를 창시한 고승이기도 하였다. 왜란 후 그의 행적이 신비화되기까지 하여 전하는 것도 그의 높은 법력에 그 근거를 두고있다 할 것이다. 문집으로 [사명집]이 전한다.
  • 조선조 세종, 문종, 단종, 세조때의 문신 본관은 양성(陽城) 삼사우윤판군기사사(三司右尹判軍器寺事) 휘 징(徵)과 진주유씨(晋州柳氏)(判書 潰의 따님)의 3남으로 출생 고려삼중대광금오위대장군 첨의평리(僉議評理) 개성윤 양성군 휘 정(?)의 현손 고려광정대부 도첨의평리 판밀직사사 상호군 양성군 휘 수방(守邦)의 증손 고려정의대부총랑상서응양상장군 휘 원부(元富)의 손으로 시조 금오위대장군 상주국(金吾衛大將軍上柱國公) 삼중대광보국 양성군(陽城君) 휘 수광(秀匡)의 9세손이다. 공이 일찍이 김제(金堤)군수로 있으때 뭇 도독이 함께 일어나 사람들이 많은 환난 을 겪었는데 날이 이미 오래 지나서 하루는 포졸을 풀어 모두 잡으니 그 고을 백성들과 여행자가 모두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1434년 세종 16년 갑인 6월 8일 강화(江華)군수로 부임한 후 판중구원사(判中柩院事) 허조(許稠)의 상언에 의하면 관사(館舍)를 지으려다가 말성이 일어났지만 임금은 김제군수때의 공로인 도독잡은 숫자만은 상고하여 아뢰라고 하다. 1437년 세종 19년 정사 10월 2일 강원도에 임금이 왕세자를 거느리고 행차시 양주부사(楊洲府使)로 고을 경계상에서 맞이하여 알현하다. 1439년 세종 21년 기미 윤 2월 19일 임금이 강원도 철원 등처에 강무(講武) 할 때 양주(楊洲)의 수당(?堂)에서 사량시 양주부사(楊洲府使)로 조복차림으로 영알하다. 이때의 선정으로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이후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옮겼다. 1447년 세종 29년 정묘 황주목사(黃州牧使), 경주목사(慶州牧使)로 있으면서 모두 혜정(惠政)을 베풀었다. 1448년 세종 30년 무진 12월 밀양(密陽)도호부사로 부임하다. 1450년 세종 32년 경오 9월 밀양부 속현인 수산현(守山縣)(현 密陽市 下南邑) 서쪽 언덕에 가운데 3칸, 좌우에 각가 3칸을 붙여 단청을 한 덕민정(德民亭) 을 세워 논밭을 개간, 연간 수백섬을 수확케 하는 등 선정을 베풀다. 또한 강가에 있는 수백호가 되는 멱례리(覓禮里), 감물지리(甘勿池里) 등은 장마때 마다 물에 잠기므로 공(公)이 백성들을 산언덕에 터를 잡아 옮겨 살게 하니 샘이 달고 땅이 기름져 민생을 안정에 하는 덕을 베풀었다 1453년 단종즉위년 계유 윤 9월 3일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로 장의동(藏義洞) 경희전(景禧殿) 수리문제로 손을 쓰지 못한 추궁을 받다. 1455년 세조원년 을해 12월 27일 판사(判事)로 원종공신 3등에 서록되다. 이후 이조참판이 되다. 1463년 세조 9년 계미 10월 15일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명나라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다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다. 1464년 세조 10년 갑인 10월 2일 행호군(行護軍)으로 임금을 따라 사냥하다. 1467년 세조 13년 정해 9월 1일 함길도에 보내는 군민(軍民)을 위무하는 총리사(摠理使)에 릉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貫)으로 결정하고 이어서 병선(兵船), 조선(漕船)을 만들 제도를 의논하고 특별히 공(公)을 불려 모형배 를 보여주고 논박 의논하였다. 공(公)이 나가니 임금이 신숙주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 이백상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기나 나는 그를 늙은 이라 허물하지 않겠다.“ 하고 드디어 신숙주에게 명하여 공(公)과 더불어 마포에 가서 배를 운행하여 시험하게 하였다. 첨지중구부사(僉知中柩府事)가 되다. 만세불망(萬世不忘)이란 흑적비(黑?碑)를 사액(賜額)받았다. 묘는 경기도 안성군 대덕면 무릉리 산 40 부인음 한산이씨(韓山李氏)로 아버지는 량경공(良景公)이종선(李種善)이요,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문충공(文忠公) 권씨(權氏)의 따님이시다. 계실은 김해배씨(金海裵氏) 남부록사 배렴(南部錄事 裵廉)의 따님으로 묘는 부하였다. 장남 인동(引銅)은 진사(進士), 차남 인석(引錫)은 왕자사전(王子師傳), 3남 인종(引鍾)은 부정(副正)이다. [참고문헌] 세종(世宗), 단종(端宗),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양성이씨대동보(陽城李氏大同譜) 및 명현록(名賢錄)
  • 1559(명종 14) ~ 1616(광해군 8) 무신 자는 자실(子實) 본관은 양성(陽城) 고려의 상주국공(上柱國公) 수광(秀匡)의 14세손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 계충(繼忠)의 아들 5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11세때 어머니의 위환에 단지(斷指)하여 치료한 효자 1583년(宣祖 16)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평산별장(平山別將) 부장(副將)으로 140여명을 이끌고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호가(扈駕)에도 참여 하고 출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1596년(宣祖 29) 창령현감(昌寧縣監)으로서 전략적 요충지인 화왕상성(火旺山城)에 현풍, 영산, 청도의 수령과 함께 들어가 성을 쌓고 굳게 지켰다. 1597년(宣祖 30) 4월 28일 밀양부사(密陽府使)가 되고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9월에 수하의 관군과 의병으로 출전 화왕산성의 수성장(守城將)으로 부산의 왜적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많은 군대가 포위했으나 백성과 함께 동요하지 않고 직접 나서서 돌격하고 야간공격 복병 등으로 왜군을 격파 57명을 베고 200명을 유인했으나 백성들을 무흘하고 편안히 살게 하여 상으로 표리(表裏) 를 하사받았다. 1598년(宣祖 31) 4월 29일 유성룡(柳成龍)은 공의 인품됨을 품의, 당상으로 승진 발탁되었다. 1601년(宣祖 34) 4월 25일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로 포로의 귀환을 보고 1603년(宣祖 36) 3월 24일 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로 왜의 강화 흉계에 관하여 장계올렸고 1604년(宣祖 37) 6월 2일 전라병사(全羅兵使) 이해 윤 9월 3일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었다. 1605년 행목사(行牧使)로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七정우 六행)에 녹훈되었다. 1610년(光海君 2) 종성부사(鐘城府使) 1614년 함경북도병사(咸鏡北道兵使) 1615년 10월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에 오르고 이듬해 상으로 숙마 1필을 하사받았으며 1616년(光海君 8) 2월 12일 통영(統營) 임소에서 병졸했다. 효행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청백위망(淸白威望)으로 이름이 높았고 선정을 베풀어 이르는 곳마다 거사비(去思碑)가 섰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징비록(懲毖錄) 사류재집(四留齋集), 우복집(愚伏集), 양성이씨대동보(陽城李氏大同譜) 명현록(名賢錄), 인명대사전(人名大辭典) ※ 단지(斷指) : 어버이나 남편 등의 병이 위중할 때 회복을 위하여 피를 내어 먹이려고 손가락을 자르는 일 ※ 호가(扈駕) : 임금이 타는 수례에 수행 함. ※ 표리(表裏) : 임금이 신하에게 주는 표상의 하나로 관복감으로 명주 또는 비단 2필
  • 정유재란에 창의한 현감. 자는 계진(季珍). 호는 시암(柴巖). 벼슬은 현감(懸監)을 지냈으며 본관은 아산(牙山)이다. 조선 선조 10년에 한양(서울)에서 찰방 장경신(蔣敬臣)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때 부터 재지가 탁월하여 글 배우기를 좋아하고 모든 일에 용감하였다. 1610년(광해 2)에 무과에 올라 부위(副尉)로 여러 직을 두루 거쳐 연일(延日) 현감(懸監)을 임명받아 고을 백성들을 다스림에 부드러웠으며 효우(孝友)를 으뜸으로 하며 문학을 계승하고, 논 갈아 농사 짓고 뽕 심어 길쌈하는 것을 풍속화 하여 권장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선정을 베풀었다고 칭송하였다. 그 뒤 광해군의 혼조(昏朝)로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망우당 곽재우 선생으로 부터 창녕 화왕산성에서 발송한 창의격문을 받고 망우당 휘하에 들어가 임기응변으로 작전에 심신을 경주 하였으므로 곽재우 선생께서 극구 치하하였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모든 범절은 가례를 좆아 정성을 다하고 세분 형님을 양친 섬기듯 지성으로 모시니 원근 사람들이 공의 효우정신을 높이 칭송하였다. 시암공실기(柴岩公實記)가 전한다.
  • 지금으로 부터 140여년전, 장응구라는 사람은 형제 중에 동생되는 분이다. 그 당시 부친은 진사 숭정대부 행동지중추부사였다. 응구는 7세 때 서당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면학심도 많았지만 부모에 대한 효도는 남달리 지극하였다. 어느날 부친께서 병석에 눕게 되자 어린 나이로 밤잠도 자지 않고 곁에 앉아 간호를 하다가 자신도 지쳐 병으로 눕게 된 일도 있었다. 그 후 부터는 부모님의 식사에 대해서도 정성을 다 기울였으며, 동지섣달에도 앞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아 반찬으로 올렸다 한다. 그 후 부친의 병이 완쾌되어 과거에 응시코자 집을 떠나신 뒤에는 천지신명께 부친이 과거에 급제 하시기를 기원하는 기도를 매일 올리며, 돌아오실 날까지 밤마다 문전에서 등불을 켜 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마침 그 정성이 헛되지 않아 진사에 급제하여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친은 99세로 장수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셨다. 무덤은 단장면 고례리 풍류동의 은점곡 산정에 있다. 자택에서 구곡천을 건너 10리쯤 떨어진 곳인데 묘소 옆에는 큰 광산 구덩이가 있는 곳이다. 응구는 그래도 생전에 부족한 효성이 한이 되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겨울이면 묘소 옆에 풍막이를 만들어 눈바람을 막아 주었고, 자신이 있는 여막에는 범이 자주 내려와서 상주를 보호하여 주었다 한다. 3년의 시묘를 마친 응구는 그 후에도 매일 산소에 성묘를 하였으며 갈때마다 돌 한개씩을 가져가서 묘소옆에 있는 구덩이를 30여년의 지극한 성묘 끝에 모두 메꾸었다고 한다. 특히 비가 와서 강을 건너지 못할 때를 염려하여 큰 나무다리를 만들어건너 다녔으나 폭우로 수차 소실된 다리를 다시 만드는 등 가진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날 강우량이 많아 강을 건너지 못하고 애태우고 있을 때 내리던 비가 갑자기 그치고 수량이 줄어 강을 건너는데 신령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묘소 앞에서 매일 성묘를 하기 때문에 손 발이 닿았던 곳에는 잔디가 자라지 못하였다고 하니 생전보다 사후에 효성이 더욱 지극하였다. 이분의 지극한 효성을 길이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주위 사람들의 주선으로 삼성각의 제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현판에는 "효자 장응구 효행"이라고 하였다.
  • 휘는 진호(鎭浩). 본관은 아산(牙山). 조선 철종 9년에 밀양군 삼랑진읍 숭진리에서 동호(東湖) 장재곤(蔣載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재지가 탁월하여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9세때에 어머니 상을 당하자 예절에 따라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지내고, 아버지는 상처로 인한 과도한 상심으로 정처없이 집을 나간 뒤로는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친척집을 전전하며 아버지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며 눈물 속에 나날을 보냈다. 그 뒤 15세가 되던 해에 밀양읍 남천강변 뱃다리 제방에 방(榜)이 붙기를 밀양사람 장 모씨가 강원도 금화군 금화면에서 별세 하였으니 연고자가 있으면 유해를 모셔가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애통해 하면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빈손으로 혼자 걸어서 며칠이 걸려 강원도 금화에 도착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은사의 아들이 찾아왔다 하여 매우반가워 하며 후하게 대접하면서 아버지의 소식을 전하였다. 고인이 이곳으로 온지 몇년동안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1872년(고종 9)에 별세하자 동민들이 장례를 지내고, 생전에 영남 밀양이 고향이라고 하시기에 주소를 모르고 이곳 금화 시장에 있는 장삿군 편에 밀양에 가거든 이 방을 붙여달라고 부탁한지가 꼭 3년이 되었고, 그 동안 동민들이 혼백(魂魄)을 서당에 모셨으며, 내일 대상제를 지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상주가 찾아 왔으니 참으로 반갑다고 하였다. 그는 대상을 마친 뒤 유해를 수습하여 등에 지고 지나가는 나그네 행세를 하면서 며칠을 걸어 무사히 밀양으로 운상하여 선영 아래 안장하니 이때 그의 나이 15세로 세상사람 모두가 놀라운 효자라 칭송하였다.
  • 자는 현재(顯哉). 호는 세심정(洗心亭). 본관은 아산(牙山). 창원에서 조경암(釣耕庵) 장문익(蔣文益)의 아들로 태어나 양부(養父) 장문진(蔣文晋) 앞으로 출계(出系)하였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따스하고 재지가 총명하여 학문을 좋아 하였으며,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였다. 1652년(효종 3) 12월 20일 아버지 조경암 공의 상을 당하자 애통하게 울부짖으며, 무덤 옆에 초려(草廬)를 짓고 비바람을 개의치 아니하고 아침 저녁으로 통곡하며 항상 묘소를 정성껏 보살피니 고을 사람들이 하늘이 낳은 효성이라 칭송하였다. 그 뒤 1672년(현종 13)에 어머니를 여의니 상예를 갖추어 밤마다 통곡하여 피눈물로 얼룩지니 그의 효성을 흠앙(欽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동생 희백(熙伯)이 어릴 때부터 재지가 탁월하므로 양친께서 "이 아해가 장차 나아갈 곳이 있을 것이나 우리는 늙어서 그 결과를 볼 수 없으니 너가 잘 지도 하여 주어라." 하셨으니 선생은 부모님이 남긴 말을 받들어 잠시도 방임하지 않고 면학에 마음을 다하도록 유도하여 두 형제가 모두 문학과 필법이 대성하였다. 선생은 만년에 동리 사람들과 협의하여 환난상휼(患難相恤) 하는 미풍양속을 함양하기 위하여 양곡 수십 석을 내어 동네 안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게 함으로써 인근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1705년(숙종 31)에 신병으로 별세하시니 장례는 삼랑진읍 청학동 가정리 선영 아래 안장하였다. 선생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선생의 호를 따서 세심정이라 편액하였으며, 삼랑진읍 금호동에 있는 정사에는 그의 글을 모은 세심정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 초동면 장송동에 정수룡이란 효자가 살았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로부터 효동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아버지가 별세한 뒤로는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였다. 가난한 살림살이를 하면서 어머니를 섬겨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언제나 집에 먼저 들어와 먼 곳에 있는 샘에 가서 물을 길러 밥 짓는 것은 물론이고 손발까지 깨끗이 씻겨드렸으며, 저녁에는 어머니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으면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새벽이면 밤사이 편안히 주무셨는지 문안 드리기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는 처에게도 효도를 가르치니 처도 그의 뜻을 따라 지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 병환이 위급할 때에는 변이 달고 쓴 것을 맛보고 병명을 알아냈으며 저녁마다 병세가 회복되기를 기도 드렸다. 그러나 병은 조금도 회복이 되지 않고 방금 숨이 끊어지려는 순간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흘려 어머니 입에 수혈하였으나 일주일 뒤에 운명하셨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빈소와 묘소를 번갈아 살피며 극진한 효성을 다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마을 사람들의 뜻을 물어 효자비를 세우고 비문을 지어 추모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였다.
  • 호는 정관당(靜觀堂). 휘는 계상(繼祥). 본관은 창녕.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던 임진왜란 때의 무장. 조선 명종 9년(1554) 2월 20일 밀양시 상남면 이연리에서 조윤전(曺潤筌)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품이 괴상하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어릴때부터 말달리고 활쏘는 행동이 비상하였다. 선조때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니 종 5품(從五品)인 판관(判官)에 제수되어 다년간 국가에 헌신하다가 낙향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니, 거처와 음식을 형과같이 하였다 한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마을 입구에 도달 하였을때 형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위급하오니 사당의 신위를 모시고 급히 피난 하십시오. 나는 나라에 헌신한 몸이니 오직 조국이 이지경에 있는 것을 보고 내 몸 살기만을 바라겠습니까?" 하며 형에게 피난할 것을 권하자, 형은 차마 동생을 두고 떠날 수 없어 서로 부둥켜 안고 통곡할 때 왜적이 급습하여 그의 형을 살해함으로써 공은 천지가 무색할 지경으로 살기 충천하여 맨손으로 적의 긴 칼을 빼앗아 좌충우돌 닥치어보니 하늘이 도운지라 그 앞에 물이 담긴 표주박이 있어 그 물을 한모금 마시고는 정신을 가다듬어 형의 시신을 수습하여 땅에 묻고, 그길로 왜적의 머리 몇 급을 말에 달고 영문(營門)으로 달려가서 사실을 고하고 원수를 갚고져 하니, 영문에서 쾌히 승락하고 예졸(銳卒)과 갑옷과 투구며 장검(長劍)까지 주었으나 장검은 뺏은 적의 장검이 있어 받지 아니하였다. 예졸만 거느리고 말을 채찍질하여 창녕 화왕산성 곽재우 장군과 합세하여 싸우고 적을 뒤쫓아 박진전투(朴津戰鬪)와 정암진지(鼎岩陳地)에서 적을 수없이 무찌르고 큰 공을 세웠다. 난리가 끝난 뒤 선무원종 2등공(宣武原從二等功)에 특진하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나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향년 84세로 여생을 마쳤다. 장례는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관동 산록에 안장하였으며 그 뒤 관찰사 홍우전(洪愚傳)이 묘갈명을 찬하였으며, 후진들의 강학소로 정관당 재실이 있고, 마산리 관동에 관곡재(冠谷齋)라는 제각이 있으며, 선무공신판관공실록(宣武功臣判官公實錄)과 왜적으로 부터 뺏은 장검(長劍)이 보존되어 있다.
  • 자는 가회(可晦). 호는 죽와(竹窩)·취원당(聚遠堂). 휘는 광익(光益). 본관은 창녕(昌寧). 벼슬은 사헌부 감찰을 지냈다. 중종 32년에 경남 창원군 북면 지개동(현 의창군)에서 증 좌참찬(贈左參贊) 노재(魯齋) 조윤신(曺允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찌기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효우충신(孝友忠信) 하였으며 퇴계 이황(李滉)선생의 제자로서 고봉(高峰), 이율곡(李栗谷), 김학봉(金鶴峰), 김동강(金東岡), 유서애(柳西崖), 정한강(鄭寒岡) 제현들과 좋은 친구로 사귀었으며, 22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별시·중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형조좌랑·사헌부 감찰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소년시절부터 남다르게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 공경을 다하였다. 봉양함에는 그 즐거움을 다하며, 병중에는 그 근심을 다하였다. 별세한 뒤에는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묘소를 살피고 명복을 빌었다. 이 효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 임금의 어명에 따라 선생의 효행 실상을 담은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과 봉양수상 여묘삼상도(奉養守喪廬墓三像圖)를 화공에게 그리게 하였으며 하늘이 낳은 큰 효자를 포양하는 효자각을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마을 앞에 세워 천양하였다. 선생은 그 뒤 형조정랑으로 승진되어 있으면서 자원하여 평안도 도사가 되었는데 이는 동생인 지산(芝山) 선생이 강동(江東)에 유배되어 있었으므로 형제가 자주 만나 한스러운 회포를 풀기위함이었다. 그러나 1년도 못 되어 1578년(선조 11) 5월 5일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밀양시 초동면 오방동으로 반장(返華)한 선생의 분묘에 봉토(封土)하고 또한 조문하기 위하여 많은 강동의 선비·백성들이 강동의 흙을 짊어지고 천리길을 멀다 않고 왔으나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묘위에 봉분을 더하고 남은 흙은 묘소 입구 가로변에 두개의 둔덕으로 나누어 모으고 대나무를 심어 표적하였다. 강동의 백성들이 선생의 효우와 도덕 문장에 순화 감복하여 강동의 흙을 밀양으로 옮겨와서 선생의 무덤에 봉분한 강동구(江東邱)의 내력은 후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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