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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진읍사무소는 송지리 외송마을 중앙 시장부근에 위치해 있다. 삼랑진읍의 원래 명칭은 하동면이었다. 밀양군의 동편 하부에 위치해 있으므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와서 하동은 일본어 발음상 下等과 통한다 하여 삼랑진역명을 따서 삼랑진읍으로 개칭하였다.
삼랑진읍이 일제 강점기에 유명하게 된 것은 진해군항과 마산, 진주방면으로 가는 철도분기점인 동시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과수원이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인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헌병대와 경찰서 등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법정동 | 연혁 및 명칭 유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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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 川 里 | 이 마을과 상남면 평촌마을 중간에 남천강이 흐르고 있어서 옛날에는 이 마을 앞에 도선장이 있었다. 양 지역을 왕래하는 나룻배를 기다리는 여객들의 휴식처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심은 것이 무성하게 자라 숲이 되었는데, 여기에서 임천(林川)이라는 마을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
崇 眞 里 | 과거 임진왜란 당시에 이 마을 주민들이 사명대사를 도와 왜적에 항거하였다. 사명대사가 이와 같은 주민들의 협조에 감사하며 숭진(崇眞)이라는 마을명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불교의 진리를 깨우치며 숭상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靑 鶴 里 | 옛날에는 이 마을의 앞에 남천강 유역 억새밭이 펼쳐져 있어 학이 많이 날아와 서식하였다. 또한 마을 뒷산에는 청송이 울창하였는데, 이로써 청송 백학의 일대장관을 볼 수 있는 마을이라 하여 『靑』자와 『鶴』자를 따서 청학리라 부르게 되었다. |
龍 星 里 | 龍星里는 청용, 칠성, 송백(솔베기), 신기, 인전마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못(池)에 용이 살고 있었는데, 신에게 죄를 지은 일이 있어 승천하지 못하고 하늘의 별만 쳐다보고 울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 전설에서 용성이라는 지명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
龍 田 里 | 龍田里는 사기점, 용어, 직전, 숲밭, 상신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자씨산 계곡과 연못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어 봄철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 농민의 전답을 황폐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 용의 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용전(龍田)이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
美 田 里 |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에 대미, 중마을, 무흘, 입성, 화성과 삼랑리에 속했던 대신을 병합하여 미전리로 법정리(法定里)를 삼았다. 옛날에 농토가 비전박토라 농사짓기가 어렵고 농민들의 생활이 곤란하였기에 비전을 아름다운 밭으로 가꾸자는 뜻을 담아 미전(美田)이라 불렀다고 한다. |
三 浪 里 | 三浪里는 낙동강 본류와 진주방면의 남강, 밀양 남천강 등 세 갈래의 물결이 서로 부딪쳐서 거센 곳이라 하여 삼랑(三浪)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삼랑진 나루터가 유명하였고, 김해와 강을 건너 마주하는 수운 교통의 요충지였다. |
松 旨 里 | 옛날에는 낙동강이 마을 중심에 흐르고 있어 사람들은 뒷산 소나무 숲에서 거주하였다고 한다. 삼랑진 제방을 축조하기 전까지 松旨里는 상습 수해지였다. 홍수로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부족해지면 주민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곤 했는데, 이에 소나무숲(松林)에서 송피(松皮)맛으로 살아왔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송지(松旨)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栗 洞 里 | 栗洞里는 율곡, 광천, 무곡, 칠기점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의 중심부에는 비교적 넓은 고지대의 경작지와 저습지가 있고, 그 양쪽에 갈미봉과 삿갓봉이 서로 마주 보면서 동서로 산악을 이루고 있는 산중의 마을이다. 율곡이라고도 부르고 있는데 이는 마을 주위에 밤(栗) 생산이 많아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
牛 谷 里 | 조선 영조 대에 이 마을의 소(牛)가 전염병으로 모두 죽어버린 일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소가 없어 몇 년째 농사를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건강한 소 두 마리가 마을에 들어왔다. 마을 주민들이 돌아가며 소를 부렸는데, 소들이 그만 과로한 탓에 죽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이 슬퍼 눈물을 흘리며 마을 언덕에 소를 고이 묻어주었는데 이후로는 해마다 마을에 풍년이 들어 잘 사는 마을이 되었다고 한다. 이에 소를 묻은 언덕이라는 뜻으로 마을을 우곡(牛谷)이라 부르게 되었다. |
儉 世 里 | 儉世里는 본검세, 검곡, 후검, 송원, 작원마을 등을 합해서 이르는 명칭이다. 옛날 마을 주민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을 때 도사 한 분이 마을을 지나가다 근검절약하여 곤경을 극복하라 일러주었는데, 이때 도사가 안빈낙도의 이치를 설명하고 마을 이름을 검세(儉世)라 지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
安 台 里 | 安台里는 배양, 동양, 서봉마을을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원래는 마을의 평안과 태평을 기원하는 뜻에서 『安泰里』라고 쓰고 있었으나 뒤에 천태산(天台山)이 있어 『泰』자를 『台』자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앞으로는 낙동강이 굽이치며 흐르고 뒤로는 천태산이 우뚝 솟아 있는 배산임수의 명지이다. |
杏 谷 里 | 杏谷里는 삼랑진읍의 동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행곡(杏谷)이라는 지명은 행곡, 남촌, 통점, 구남, 안촌, 숭촌 등을 합해서 부르는 이름인데, 골짜기마다 살구나무가 많아 봄철이 되면 꽃이 만발하는 아늑한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
백산이란 넓은 들 가운데에 서있는 독산이란 뜻이다.
도선의 지리지에 이르기를 "수산현 동쪽 에바다에서 달이 뜨는 것과 같은 형상의 명당이 있다. " 하였는데 뒷 사람들은 이곳이라 하였다. 그 남쪽산록에 정자가 있어 백산정이라 하였으며 수산현3승의 1이었다 한다.
대사리는 본래 대사동리였는데 국농소(둔전)이었던 수산들을 하사 받았던 봉선사란 큰 절이 없어진 뒤에 "절동리" 란뜻으로 부르다가 사(寺)와 사(司)가 서로 음이 같으므로 대사리로 관용하게 되었다. 정남정이란 정자가 있어, 신라왕에게 가락의 구현왕이 항복한 곳이므로 정자 를 짓고 정남정이라 하였다 한다.
내서동 람수정의 아래쪽에 있었던 수산현의 공해건물이었다. 권람의 덕민정 기문에 의하면 덕민정은 1448년 이백상이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수산현의 공해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50년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3간의 건물을 지어 현 청의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좌,우에 각각 3간씩 붙여 단청을 하였다. 또 건물의 관리상 필요한 부속 건물을 지어 본부에서 수산현으로 파견한 사람들을 소속시켰으며, 주변의 전답을 개간하게 하여 해마다 수백 석의 수확을 거두어 손님 접대 등 현의 경비로 충당케 하였다. 수산현은 지리적으로 밀양에서 50여리 지점에 있다.
현의 남쪽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어서 영남의 물산과 조운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현을 지나가는 사명이나 귀빈이 많았고, 본부에서 이들을 영접해야 했으나 현에는 공해가 없어 빈객들은 모두 본부의 객사로 안내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많았다.
덕민정이라고 부른것은 덕으로서 백성을 다스리고, 교화하기 위해서 세운 공해라고 해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덕민정과 남수정이 다 소실되고 말았다. 임난후 그 곳에 람수정과 수산창만 중건하였다. 숙종 때 낙동강의 범람을 관측하여 수산창에 불을 질러 들판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을 구한 영장 김기의 공을 표창하여 덕민정, 람수정의 구허를 그에게 하사하였다.
내서동 낙동강 언덕가에 있다. 현재의 람수정은 광주 김씨 일문의 대종실이 되었다. 원래는 수산현에 소속된 누대로서 1538년에 부사 장적이 창건하였고, 1593년 어득강이 후임 부사로 도임하여 단청을 한 후 "람수" 2자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
1542년에 부사 박세후가 10간의 부속건물로 지어 현사로 삼고, 주위에 담장과 대문을 설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건물이 다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다. 그 뒤에 유허 한 쪽에 수산창을 건립하여 곡식을 보관하였다. 숙종때 영장 김기가 낙동강이 범람하는 것을 보고, 수산창에 불을 질러 많은 인명을 구한 공으로 이 일대를 하사받아 이 지방에 살던 광주 김씨 일문의 사패지가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수산의 경계 내에 있다고 해서 수산제라고 한다. 현재는 하남읍과 초동면에 걸쳐서 위치하고 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이미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를 하기 위하여 축조되었다고 한다. 문헌상으로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가 없다. 경상남도 지정문화재(지방기념물) 제102호로 전북 김제의 벽골제, 충북 제천의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농경문화유적으로 불리는 삼한시대에 축조된 관개수리시설이다.
본래는 신포향인데 섶과 삽은 옛말로 음이 서로 같으므로 삽포라 이르다가 뒤에 사포라 하게 되었다. 마을앞 밀양강변에 포구가 있어 서울로 드나들던 뱃길이었다.
역시 같은 신포향이었으며 중포, 현포를 합하였다.예림서원이 있고, 억선암, 산수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행정리동으로 후사포라 한다.
점필제 김종직선생께서 태어나신 후에 앞냇물이 달았다고 감천이라 하였다 한다.
신라의 오정부곡이다. 오례리라 하였는데 오(烏)와 오(五)는 서로 음이 같으므로 오례리(五禮里)라 하게되었다. 바위 틈에서 솟아 나는 맛이 달고 시원한 약샘이 있으며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이 있었다.
밀양의 鎭山이며, 主峰의 높이는 999m정도이며, 주봉과 비슷한 또 한 봉우리가 동서를 나란히 솟아있고 그 등성이가 황소의 등을 발불케 하며, 두봉우리의 중간쯤에서 남쪽으로 또 한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이를 俗稱 작은 華嶽山(720m)이라고 한다. 화악이란 이름은 이 세 개의 봉우리의 형상이 중국의 五嶽의 하나인, 西嶽 즉 華嶽의 三峰과 비슷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密陽府의 案山으로 남쪽에 있어 남산이 되었고, 종'字'는 옛날 큰 海溢이 있어 온 땅에 물이 덮혔는데 南山 꼭대기가 종지만큼만 남았다는 民譚이 있어 그 종지의 종'字'를 따서 終南山이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 唐나라 首都의 南山이 終南이였기 때문에 우리 서울의 南山도 終南이라 하였고, 이것을 모방하여 이 密陽府의 南山도 終南山이라고 했던 것 같다.
옛날의 평능부곡인데 마을에는 금곡원이 있었으며, 마을뒤 분항산 산정에는 봉수대가 있었고, 산록에는 분통곡이 있는데 감여가 성지에 이르기를 "선녀가 구곡(九谷)뒤 옥교봉에서 와서 이곳에서 분당장을하였다." 고 전한다.
본래의 이름은 고리였으며 혹은 노진(魯津)이라고도하였다. 쇠를 깎아 세운 듯한 백여길의 대(坮)위에 몇 그루의 노송이 서 있으며 이를 속칭 만년송이라 한다.
옛부터 매화리라 하였다. 마을 북쪽 매전천가에 벼랑이 있는데 마전암이라 한다. 세상에서 전해오기를 가야시대의 이서국 땅인데 신라가 이서국을 칠 때 이서국의 많은 병마가 벼랑 아래로 떨어진 뒤부터 마전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오악현의 유지라 한다. 오곡리, 사지라라 하였다.조방장대, 즉 깊은 연(淵)에 높은 돌 벼랑이 튀어나온 곳인데 임진왜란때 조방장 정희연의 영병이 주둔 하였으므로 조방장대라 부르게 되었다. 안인리, 옥산리, 도곡리, 파서리
신덕마을 뒷산에 있는 산간분지를 가리키는 지명인데, 나무가 우거진 곳이라 하여 갓골이라 한다. 옛날 이곳에 신덕사라는 절이 있었다하여 지명을 신덕이라 하였다. 현재 절터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며 산속마을이라고도 부른다.
길곡과 외가곡 사이 들판에 남아있는 지명인데, 옛날 보두꾼과 마꾼들이 쉬어가는 주막껄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고려시대이래 유천역, 신원, 분항 봉수대등과 인접하여 성현도(청도)에 이르는 교통 통신상의 길목이며 용가역 피발창에 소속된 기발꾼과 보잘꾼들이 자주 이용하는 휴게소가 있었다. 보발꾼은 말타고 달리는 기발꾼과는 달리 걸어서 나라의 급한 공문을 전달하는 관속들인데 민간에서 삯을 받고 급한 심부름을 하는 보행꾼과는 구별된다. 보두꾼이란 이런 보발꾼과 보행꾼을 통들어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이 잠깐 쉬었다는 주막껄을 흔히 부둣껄이라 한다. 이곳에도 옛날에 주막과 연못이 있었고 대추나무와 백일홍도 있었다. 지금도 백일홍나무의 그루터기가 있고 대추소라는 연못의 지명이 남아있다.
오곡마을 앞에 있는 산으로 원이름은 오체산이다. 산세가 아름답고 그 모양이 까마귀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한 형상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오곡이라는 마을이름도 오산 아래 골짜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본래의 이름은 죽원이었는데 상말로 다원이라고도하였다. 마을앞에 관율숲이 있었는데 밤밭이 없어지고 마을이 생겨 밤밭 즉, 율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암산, 독조산이 둘러있고 마을 앞엔 금수가 흘러 일찍부터 마을이 융성하여 밀양부의 동창이 있었다. 운문사의 창건주 비허선사가 살았던 봉성사 유지가있다.
본 이름은 와야(瓦野)인데 마을 앞에 금교들이 있으며 상말로 금물고(琴勿古), 또 욕요라 부른다. 마을 동천단장천 하류엔 긴 못이 있었는데 등연이라 불렀으며 그 남쪽에 칠곡이 있고 그 북쪽에 관율숲이 있어 동림이라 하였다.
본래는 남가곡(南佳谷)인데 일명 엄광 사절이 있어 엄광리라 하였으며, 상촌.중촌을 합하였다. 마을 뒷산을 엄광산이라 하며 또는 실혜산이라 한다. 지금은 행정리동으로 숲촌, 다촌으로 나누었는데, 다촌은 엄광사에 딸린 차밭이 있었던 곳이다.
본래의 이름은 용천리였으며 용암,저전을 합하였다. 마을 어구에 협곡상태의 바위벼랑 아래 산내천 맑은 시냇물이 흘러 수석이 명미하다. 임진왜란 때 밀양사람들이 이곳에서 왜적의 길을 막으려 하였다.
본래는 원당리라 하였다. 서곡을 합하였다. 서곡은 석곡인데 석골사 절이 있어 석골이라 하며, 줄여서 석동이라고도 한다.
옛날의 천화리를 삼양과 남명으로 나누었다. 석남고개로 울주군과 통하며, 얼음골, 호박소, 이목굴 등의 명승지가 있다. 임고리(臨睾里), 소고(所古), 반례(盤禮)를 합하였다. 소고의 본 이름은 소고례리 였는데 줄여서 소고라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밀양도호부 관내에 도기소가 한 군데가 있는데 그 소재지가 부동의 단장리라 하였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이존록'에는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다가 전사한 그의 외조부 박홍신의 유의를 묻은 가묘가 단장리에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단장리란 마을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이어온 것임을 알 수 있고 단봉정에서 유래한 단정이란 다른 이름도 전해온다.
17세기 말에 발간한 밀주구지의 기록에는 이곳을 사촌리, 일명 제초동이라 하였고, 그 후 구며리와 덕성리를 합하여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삼았으나 1906년 지방행정 개편시에 구미(龜尾)를 구미(九美)로 표기하여 사촌을 아울러 미촌리라 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폐합조정에 따라 덕성리를 밀양읍에 이관하고 구미, 사촌, 안법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법정리로 미촌리를 두고 사촌과 구미를 행정마을로, 자연마을로는 사촌에 사촌, 구미에 동촌, 서촌으로 나누어 오늘에 이른다.
동리 한가운데 법흥, 감물의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한 안법천(연화수)가 서북으로 흐르면서 법흥, 안법, 미촌리 등 이른 바 삼동의 젖줄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방리가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웃 마을인 사촌과 함께 대개 조선조 초기 이래 선비들의 복거지로 서 알려져 왔다.
법산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마을이 열린 곳인데, 1914 년에 지방 행정 구역 폐합시에 사지와 상봉을 아울러서 법흥리로서 행정 리를 삼았다. 법흥이라는 동명은 법산을 비롯한 여러 마을이 함께 興하라 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옛날부터 샘물이 차고 달았다 하여 단물리 또는 감수(甘水)를 감물(甘物)로 표기한데서 비롯된 지명이라고 하고 일제감정기에 감물(甘勿)로 변경하여 지금껏 부르고 있다고 한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개편때에 진주동과 동진주동을 중심으로 장재골, 갓돌, 열두들 등 자연취락을 모두 합하여 국전리라는 법정리를 삼았으며 해방 후에 다시 편의에 따라 동, 서로 나누고 국동과 국서로서 행정마을을 개편하였다.
단장면(丹場面)의 중심 지대에 위치한 동리(洞里)이다. 구한말(舊韓末)에 발간한 밀주지(密州誌)에는 무릉동리(武陵洞里), 지사동(智士洞), 노곡(蘆谷) 등의 방리(坊里) 이름을 표시했는데, 모두 이 동리(洞里)에 소속된 것이며 관문(官門)으로부터 30리 거리라 했다. 산천(山川)이 수려(秀麗)하고 골짜기가 깊지만 비교적 수리(水利)가 좋은 경작지(耕作地)가 많아 옛날부터 살기 좋은 마을로 알려져 왔다.
태룡국민학교가 있는 옛 마을 태동을 중심으로 그 북쪽 들판에 들마와 면소재지인 연경이 차례로 자리 잡고 있으며 단장천의 넓은 하천을 건너 용회와 마주보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태동, 연경, 용회동, 야촌 등 네 자연마을을 합치고 있다.
사연(泗淵)이란 지명은 사연(沙淵)의 음(音)을 표기하면서 사수(泗水) 또는 사빈(泗濱)으로 아화(雅化)하여 이 곳에 정거(定居)한 선비들이 붙였다고 한다.
동리(洞里)의 중심 마을으로 메물산(木麥山)을 등에 지고 고사천(姑射川) 동편(東便) 강가에 자리잡은 고촌(古村)이다. 마을 앞에 호수처럼 생긴 깊은 소(沼)가 있어 범도연(泛棹淵) 또는 도연(棹淵)이라 했으며 동리(洞里)의 지형(地形)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돛단배 같다 하여 붙인 지명이라 한다. 또 범돈, 범든이라 하는 것은 범도연(泛棹淵)의 발음이 줄고 바뀌어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유상(遊賞)했으며 승경 (勝景)을 읊은 시(詩)도 남기고 있으니 마을의 여러 지명도 선생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례리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 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고, 당초의 지명은 고예(庫藝)라고 했다. 또 동리 (洞里)의 형국이 마치 서북쪽에 있는 범도행주(泛棹行舟)를 마고 할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여 고예(姑曳)라고도 했으며, 그 뒤 신선이 사는 곳을 가상하여 고사리(姑射里), 고사산(姑射山), 고사천(姑射川) 등으 로 아름답게 바꾸기도 했다.
이 마을은 원래부터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귀내(龜川)의 천명(川名)으로 인하여 귀내 또는 구내라 하였고 구천(龜川), 구천(仇川)으로 표기된 것이다. 더구나 삼거(三巨), 시전(枾田)을 포함한 구천리(九川里)라는 법정리(法 定里)가 정해진 후로도 이 마을을 원래의 구천(九川) 곧 원구천(元九川)이라 한 것만 보아도 아홉개의 시내 때문에 생긴 지명이라 한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예림으로 한 것은 1635년(인조 13, 을해)에 덕성리(현 밀양시 활성이동) 에 있었던 점필서원을 이 곳으로 옮겨 예림서원이라 함으로써 마을 이름도 예림으로 했다는 정설이 있다.
예림리 동쪽 강가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옛날에 강물의 범람을 막아 전답을 보호하고자 심은 운례수 한가운데 숲과 숲 사이에 생긴 마을이라는 뜻에서 양림간 마을이라 했으나 지금 그 숲은 없어졌다.
예림 본동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운례에서 파생된 이름인 듯하다. 운례의 아랫마을이라는 뜻으로 그 안 마을에 해당하는 운내와 대칭되는 지명이다.
예림리에서 가장 안쪽 산 밑에 있다 하여 안골이라고도 하는데 바로 運禮라는 옛마을을 가리킨다. 운래의 이름의 유래는 을자형으로 굽이 돌아 흘러온 응천강 물이 이 마을앞에 이르러 정체되지 않고 운세대로 직류하는 곳이라 하여 운류(運流)가 운례로 표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림 안골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어느 여름에 한 선비가 말을 타고 가다가 갈증이 나서 물을 찾았으나 물이 없어 두리번거리다가 잠시 앉아 쉬고 있었는데 그 동안에 타고 온 말이 말발굽으로 땅을 파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 물을 마시고 갈증을 풀었는데 그 물맛이 꿀맛같이 달았다고 하여 그 후 사람들이 단물이 나는 샘이라 하여 단샘 또는 단천이라 했으며, 단천의 마을이란 단촌,당촌으로 전와(轉訛)한 지명이라 한다.
예림 앞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일제 시대때에 형성되었다. 곧 일본인 농장주 탕천이란 자가 계속하여 양철 집을 짓고 살았으며, 그 후에도 계속하여 일본인 농부들이 즐겨 양철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자연 양철집 마을이 되었다. 그리하여 양철마라는 이름이 생겼고 예림의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동촌이라 불렀다. 또 옛날 이 부근에는 참나무숲이 있었으므로 참나무징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기산리와 예림리에 걸쳐 있는 들마을인데 일부는 기산리에 일부는 예림리에 속해 있는 신생 마을이다. 큰 성공을 기원하는 동민들의 뜻을 풍기는 지명이다.
기산(岐山)은 본래 기산(箕山)으로 표기했는데 그것은 뒤쪽의 키 모양과 같다고 해서이다. 그러나 키는 앞이 트여 벌어져서 키질을 할 때마다 곡식이 날아가므로 마을의 복과 부가 빠져나가서는 안된다 하여 키의 앞쪽에 해당하는 마을 앞을 가로 막는다는 뜻에서 기산(岐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한다.
고실 북쪽 산 기슭에 위치하였고 고실 보다 먼저 생긴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인데, 고실의 안쪽에 있는 마을 이라는 뜻에서 고내실이라는 다른 이름도 있었으나 대채적으로 고노(古 魯)또는 고노(古老)로 표기했다.
기산리 본동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본래는 골짜기로 이루어진 터전 이었으나 아주 오랜 옛날에 큰 비가 내려 산 사태가 지는 바람에 골짜기가 온통 메워지자 평지와 같이 되었다. 푹실이란 지명은 골짜기에 산이 푹 내려앉아 마을이 이루어졌다는데서 생긴 것이고, 우곡(牛谷)이란 표기는 큰 비로 인하여 동네가 된 골이라는 뜻이다.
내금마을의 북서쪽에 위치한 고촌이 다.지명을 이듬,이드미,이담이라 한 것은 옛날 이동음부곡(伊冬音部曲)에 서 파생된 것이다. 이연이란 한자 표기는 옛날 이곳에 가연이라는 못이 있어 이동음(伊冬音)과 가연(柯淵) 두 지명을 아울러 취한 듯하다.
안쪽에 있는 금동이라 하여 내금이라 하였는데 외금과 대칭되는 지명이다. 본래 금동은 옛날에 금동 역이 있었던 곳으로 동으로 삼랑진읍까지 25리, 서쪽으로 무안면까지 35리, 남으로 하남읍까지 30리인데 사방팔방으로 역원을 둔 영남대로상의 교통요충지였다. 금동(金洞)을 지금과 같이 금동(今洞)으로 지명을 바꾼 것은 금자(金字)의 뜻이 강하고 소리가 나며 부딕힐 때 불꽃이 튄다 하여 부드럽게 완화하기 위하여 같은 음인 금자로 취한 것이라 한다.
내금의 동남쪽 국도변에 있는 큰 마을이 다. 일명 역금동이라 한 것을 보면 이곳이 옛날 금동역의 역말 중심이 며 내금에 대칭되는 마을이다. 기록상에는 임진왜란 이전에 영남대로의 교통 요충지로서 그 전성시에는 역장을 비롯한 역사, 역졸, 역노, 관비 등 종사원만도 300명이 넘었고 대, 중, 하로 구분한 역마가 수십 필이나 되어 왕래하는 관인들과 여행객으로 붐빈 도회였다고 한다.
평촌이란 지명은 평평한 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서북쪽 낮은 산기슭에 등을 지고 응천강의 흐름을 동남쪽으로 바라볼수 있는 배산임수의 평화스러운 마을이라 할수 있다. 동명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을 비롯한 크고 작 은 국난을 당했을 때 이 마을만은 피해를 당하지 않고 평화를 지킬수 있었다는데서 평촌이 되었다고도 한다. 그래서 동네는 평안하고 살기가 좋아 날이 갈수록 인구가 늘어났는데 1982년에는 단위마을로는 너무커 서 1구,2구,3구로 행정단위를 구분하였다.
평촌에서 동북쪽 응천강 가에 자리잡은 들 가운데 있 는 마을이다. 1030년 전후에 응천강 제방공사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숙 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지은 가건물을 공사를 마친후에 개조하여 민가로 삼고 그 자리에 눌러 앉음으로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을 이름 은 당시의 주민들이 부지런히 일해서 한번 크게 일으켜 보자는 결의의 뜻으로 1932년에 마을총회에서 결정한 것이다.
동네 안산이 말처럼 생겼다 하여 말미라 불리어 오고 있는 고촌이다. 마을 안 이곳저곳에서 지석묘와 각종 석기, 패총 유물 등 매장 문화재가 발견된 일이 있어 선사시대 이래의 주거지 임을 짐작하게 하는 곳이다. 이 마을 서쪽에 이웃해 있는 무량원이란 관영 여숙(旅宿)이 조선초기에 폐쇄되어 옮겨온 후 무량원이 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금동역이 백족으로 옮겨지고 백족에서 다시 이 마을로 옮겨짐에 따라 마산원이 역으로 승격된 바 있다. 그러므로 이 곳은 역 마의 사육과 관리 등으로 말과는 더욱 밀접한 관계를 이루었고 영남대 로의 교통 요지로서 관인과 여행객의 출입이 빈번한 도회를 이룬 마을 이다. 그러나 역은 곧 없어지고 원도 제도의 폐지와 함께 그 자취가 사라졌다.
마산리 서북쪽 등성이 너머에 있는 마을이며 조선 초 기 이래의 원(院)터가 남아있다. 원이란 역과 역 사이 또는 역 부근에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들을 위하여 설치한 국영의 여숙소(旅宿所) 같 은 곳인데 원집 이라고도 하였다. 원집에는 원주를 두어 소속된 전답을 경작하여 경비충당을 했으며 인근의 승려들을 원주로 삼은 경우가 많았 다. 이 곳에도 옛날부터 절이 있었으며 무량이란 지명도 절 이름과 관 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천 동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동국여 지승람 등의 문헌에는 운막향의 옛터라 하여 속칭 백족(白足)이라 고 표기하였다. 옛날 마산 앞에 있는 돌더미에서 백마가 나타나 강물을 마시고 사라져 버린뒤에 그 발자국을 남겼다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배죽의 남쪽 들가운데 서쪽 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마을이 다. 동산이라는 독뫼(獨山)를 중심으로 형성된 고촌인데 어은동과 외산 리와 인접하였다. 조선 후기에 창녕조씨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았으며 창녕 성씨의 구거지 이기도 하다.
외산리의 본동으로 행정구역이 다른 동산과는 작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경계를 이루고 있다. 외산이란 지명에 대하여는 오산들 너 머에 있는 바깥 산 마을이라는 일설과 동산 바깥에 있는 들 마을이라는 다른 일설이 전해지고 있다.
외산리 가장 큰 들 가운데에 있는 마을 인데 오미 또는 오산(吳山)이라 부른다. 한자상의 표기로는 원래 오산 (鰲山)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있는 독뫼의 형상이 자라처럼 생겼다 해서 생긴 이름인데 그 뒤 오산(吳山)으로 바뀐어진 것은 글자 쓰기가 너무 어려운 데다가 이 마을에 오씨성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바꾸었다는 일 설이 있다. 오산(烏山)이라는 지명에 대하여는 어느때 낙동강이 범람하여 온 들판 이 물에 잠겼는데 이 마을 독뫼의 꼭대기만 물 위에 나와 있어 그 곳에 까마귀들만 남아서 까옥까옥 울었다는 설화에서 기인된 것이라 한다.
큰 어은동과 작은 어은동으로 땅이 나누어져 있다. 풀숲이 우거진 마을앞 질펀한 늪속에 물고기가 숨어 살았다 하여 어은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이 곳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보아 제방이 없었던 시절에는 낙동강 물이 밀어닥쳐 마을 앞 숲속으로 고기가 숨이 들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조음리의 본동이 곧 조동인데, 서쪽 들판에 위치한 조서와 대칭되는 이름이다. 마을의 동,남,북 셋방향이 모두 산으로 둘러 싸이고 서쪽으로 하남 평야를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아늑한 옛 마을이 다. 밀주구지 등 옛 문헌에는 마을이름이 소음(召音)으로 되어 있는 바 이는 소자의 속음화에 따라 후일에 음이 동일한 조음으로 표기된 것이다.
조음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임 지명이다. 조동 을 조음 본동이라 한다면 조서는 조음의 서부 곧 명성과 하남읍 남전리 에 속하는 효자문껄을 아울러 지칭하는 곳이다.
북쪽으로 종남산이 서쪽으로 덕유산이 병풍처럼 둘려 지고 동쪽에만 들판이 전개된 산중 마을이라 할수 있다. 종남산 아래쪽 에 있다고 하여 남산리가 되었는데 옛날에는 남산에 영은사와 봉수대가 있어 비교적 마을에 사람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본래의 동명(洞名)은 구법리 혹은 구박리하고 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남동, 평 리, 새마를 아울러 남산리가 되었다.
남산 동남쪽의 평지에 있는 마을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옛날 이 마을의 박씨 가문에 5형제가 한꺼번에 과거에 동방급제하여 그 영광을 기리기 위해 5형제의 五자를 따고 동방이라는 榜자를 따서 오방동이라 했다고 전해지나 구체적 사실에 대해서는 문헌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오방리 뒷산(함박산) 정상부 애기바우 밑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이 곳에는 굴바우가 있었다고 해서 굴바우등 혹은 굴밭등이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굴이 있고 또 그 안에는 약샘이 있어 이 샘물을 마시면 속병이 완치된다고 전해 오고 있다. 애기바우는 생긴 모양이 마치 애기를 업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하고 탕건을 쓴 모양같기도 한데 만약 탕건바우라고 불렀다면 이 마을에 많은 관원이 배출되었을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온다.
낙동강의 제방을 쌓기 전에는 초동들이 늪지대였는데 큰 홍수가 나면 이 마을 앞까지 범선이 와 닿았다고 하여 범선의 범자를 따고 이 마을의 지세가 평평하여 범평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음.
명포의 옛 이름을 범미라고 하며 지금도 벌미라 부르고 있으며 이 마을의 앞벌이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며 명포라고 한 것은 밝은 개펄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한복판에 바위가 있는데 그 모습이 별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성암으로 불리운게 지명의 유래가 되었음.
대곡의 서쪽 큰골산 너머에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은 사람 사는 집이 열 집이상 늘지 않는다고 해서 지산열이라고 전해지고 있음.
일찍이 가락국왕이 이궁대에 왔다가 수레를 타고 차월고개에 와서보니 마을의 지세가 반달간이 생겼다고 하여 반월이라 불렀다고 하며 일설에는 이 마을 앞에 있는 늪의 모양이 반달같이 생겨서 반월이라 불렀다고 함.
이 마을은 옛날 가락국왕이 수레를 타고 지나 갔다고 하여 수레마을 혹은 수리마, 수레마 등으로 불렀다고 하며, 이것을 한자 표기하면서 차월이라 하였음.
이 마을은 초동면 안지대에서 보면 마을 주변이 산으로 둘러 쌓여 마치 봉황이 활개를 치는 것 같다고 하여 봉황리라고 지명을 붙였다고 함.
이 마을은 초동면 방동쪽에서 보면 마치 배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와지라고 불렀다고 함.
예부터 전해 오는 바에 의하면 이 마을은 밀성손씨, 김해김씨, 달성서씨 등 세 성씨가 모여 살았다고 하여 삼손이라는 지명을 붙였다고 함.
마을의 주변 지세가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하여 새월이라는 지명을 붙였다고 함.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신월리에 복거하던 박이눌이 장질인 박범과 함께 덕대산의 아래쪽에 있는 원당산곡에서 피난을 했는데 난이 끝나자 장질인 박법이 이 곳에 터를 잡아 지명을 새터라고 붙였다고 함.
이 마을은 문헌에는 대고지, 대구지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초동면 구령리 앞산인 통암산의 산세가 마치 큰 거북의 형상이라고 하였는데 대구말은 거북의 꼬리 부분에 해당된다고 하여 부른 지명이다.
이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험하다고 하여 검암이라고 불렀다고도 하며 또한 이 마을내에 있는 창고 자리가 옛날에는 연못이었는데 이 곳에서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하여 지명을 붙였다고도 함.
행정적으로는 검암리에 속해 있는 자연마을이다. 이 마을의 옛 이름은 신촌이다. 송은 박익의 차자인 인당 박소가 춘정 변계량 3부자와 교류하기 위해 부북면 후사포리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새로 자리잡은 곳이라 하여 신촌이라는 지명을 붙였다고 하며, 모선동이란 지명은 박소의 증손인 박수견이 모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마치고도 귀가하지 않고 묘역에서 쇄소전갈을 일과로 삼아 여생을 마치니 후인들이 공의 효성을 추모하기 위하여 부근의 산천 방리를 모선이라는 지명을 붙여서 모선동이라고 한다.
마을의 뒤쪽에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데 마을 뒤의 강줄기가 굽어져 흘러 마치 곡수의 풍취를 방불케 한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옛날 수산제의 가장자리에 있었던 마을로서 수산제가 개발되기 전에는 마을앞까지 늪지대가 되어 많은 연밭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이 연꽃이 만발하면 금빛 찬란한 포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소태리에서 경북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와 풍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옛날에는 밀양에서 청도로 가는 대로(大路)였다고 한다. 이 고개는 산세가 마치 소리개가 하늘 높이 날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근치재라고 한다. 이것이 변해서 지금은 근티재라고 부른다. 조선 후기에 나온 "해동지도", "청구도" 등 여러종류의 고지도에는 근현 (芹峴)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고개의 정상에서 왼쪽으로는 청도군 각남면 옥산리로, 오른쪽으로는 풍각면으로 가는 도로가 있다
두곡리 가곡동 마을에서 경북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 묘봉과 경남 창녕군 성산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구룡골재에서 북쪽으로 약 700m 위쪽 천왕산 기슭에 있다. 이 고개에서 왼쪽으로 가면 창녕군 성산면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면 경북 청도군 풍각면 월봉리 묘봉으로 간다. 이 고개는 천왕산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과거 1950-60년대에는 옹기 장수들이 이 재를 넘어 옹기를 팔러 왔다고 한다. 가곡 마을내에 정자나무가 있는 곳에 주막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이 재와 구룡골재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이곳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한다.
가곡동 마을의 북쪽에 있는 배바우산 정상에 있는 바위이다. 천지개벽 때에 다 물에 잠겼는데, 이 때 이 바위에서 배를 메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 배바우가 있다고 해서 이 산을 배바우산이라고 한다. 지금은 잡목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조천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며, 이 마을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가 화왕산성에서 진을 치고 이곳에서 무쇠를 파서 화살을 제조하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밀양읍성에서 해천의 루교를 지나 사포쪽으로 통하는 큰길을 이르는 말로써 지금의 밀양고등학교의 앞마을과 국립식량과학원기능성작물부 입구의 사거리 부근을 속칭 댓껄이라고 한다. '댓껄'이라는 명칭은 이 길 주변에 옛날에는 대나무가 많이 있어서 그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한편 '큰거리' 곧 '대거리'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말도 있다
옛날 밀양부 관아에 속한 별포군의 주둔지가 현 한국전기연구원밀양나노센터와 국립식량과학원기능성작물부 부근이라 한다. 지금의 응천강은 제방을 축조하기 전에는 강물이 자유로이 드나들며 강변이 마치 넓은 운동장 같이 되어 군사 훈련장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별포군의 군사훈련장, 곧 '진을 치는 장소'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영남농업시험장 입구 사거리에서 남쪽, 제 2 밀양교에서 북쪽 지역 일원이 진장에 해당되는데, 이곳은 법정구역으로는 삼문동에 속하는 번지를 가진 지역이고, 행정상으로는 내이동에 속하는 지역으로 되어 있다
속칭 '벙어리 신작로', '버버리 신작로' 라고도 한다. 내이동 중심부를 동서로 관통한 도로인데 현 한국전기연구원밀양나노센터와 밀양고등학교 서편의 도랑이 지금은 복개가 되어 있어 길이 뚫려져 있지만 옛날에는 도로의 서편 끝 쪽이 뚫려져 있지 않아 도로가 동가리로 되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동가리 신작로'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이다.
국도24호선과 국도25호선이 교차하는 부북면 방향과 시청방향의 신촌4거리 북쪽에 외관상 자연암처럼 보이는 큰바위로 옛날부터 '토끼바우', '뒤께바우'라는 속명으로 통하고 있다. '토끼바위'라는 이름은 옛날에 바위 두 개가 토끼의 귀 모양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는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일본인이 부북행 신작로 (도로)를 만들면서 두 개 바위 중 한 개는 깨어 없애 버리고 지금은 한 개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여러 사람들이 토끼바위에 불을 켜고 치성을 드리는 일이 있었으며 이 주변의 들을 '뒤께바우들' 이라고 하나 지금은 구획정리로 주택 및 상가지역으로 변하였다.
교동1통의 동쪽인 현재 화장터 골짜기를 말하는데. 옛날에 이 마을에서 9대로 진사가 배출되었다고 해서 구딧골이라 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9대의 어원이 구딧으로 변한것이다.
교동1통의 동쪽인 공동묘지 밑 골짜기인데 옛날에 유명한 대목(목수)이 있어 대목골이라 하고 못(池)을 "대목골못"이라 하며 교동 1통에서 모례로 넘어가는 고개를 "대목골 고개" 라고 한다. 대목골 동쪽에 있는 산을 "용지산"이라 하고 교동 1통에서 용평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용지고개"라고 한다.
교동 1통 북쪽, 향교 옆 골짜기가 교동안에 있다고 하여 안골이라 하고 안골에 있는 못을 안골 못 이라 하며 안골 남쪽에 있는 들을 내동들이라고 하는데 현재는 들이 거의 없어지고 주택들이 산재해 있다.
춘복을 범북이라고도 한 것은 春자의 뜻을 풀이한 봄이 범으로, 福은 변해서 북이 되어 범북이라는 설, 춘복 뒷산 모양이 범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하여 범복이 변해서 범북으로 되었다는 설. 원래 이 마을에 범이 자주 내려와서 인가에 피해를 주므로 마을사람들이 범을 잡아서 가죽으로 북을 만들어 매일 밤에 북을 치니 범이 하산하지 못하였다고 해서 범북이라는 설등 여러 가지 있음.
조선 명종때 문과에 급제, 정랑을 거쳐 예안, 김제. 울산군수 등을 지낸 추천 손 영제(1521-1588)선생은 이퇴계 선생의 제자로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고 항상 퇴계 선생을 추모하는 뜻에서 모례서당을 편액하고 정명을 오연이라 하는데서 기원된것으로서 주위마을을 모례마을 이라 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