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밀양의 독립운동가

밀양출신 독립유공자 공훈자료

  • · 성명 오학성
  • · 생존기간 1880.10. 1 ~ 1925. 6. 9
  • · 출생지 밀양 단장면
  • · 운동계열 3.1운동
  • · 훈격(연도) 애족장(1995)

공적내용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그는 불교 승려로 1919년 4월 4일 밀양군 단장면(丹場面) 대용동(臺龍洞)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대용동의 만세운동은 통도사(通度寺)와 표충사(表忠寺)의 불교 승려들이 주축이되어 계획한 것이었다. 1919년 3월 20일 경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오학성을 비롯하여 이장옥(李章玉)·이찰수(李刹修) 등 50여 명의 통도사·표충사 승려들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뜻을 모으고, 단장면에 있는 표충사에서 거사를 계획해 나갔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던 사명대사( 溟大師 ; 松雲大師)가 개산(開山)한 사찰로서, 절이름도 사명대사의 시호인 표충(表忠)을 따름으로써 항일정신이 깊게 배인 곳이었다. 이 같이 항일구국의 역사적 유서가 깊은 표충를 거점으로 거사를 추진하였던 이들은 거사일을 4월 4일 대룡리의 단장 장날로 정하였는데 이날은 사명대사의 춘향일(春享日)에 해당되는 날이기도 했다.

 이들은 서울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 외에도 별도로 '선서(宣書)'라고 제목한 격문을 기초, 인쇄하여 인근 각처에 배포하면서 동지를 규합해 갔다. 그리고 거사에 사용할 태극기도 수백 매 제작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4월 4일 정오에 오학성 등은 비밀리에 연락되어 모인 5천여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하는 것과 함께 네칸 길이의 간두(竿頭)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을 흔들고 나팔을 울리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에 5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만세시위를 개시하고 헌병주재소로 향하였다. 헌병주재소 앞에 이른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이를 탄압하는 일본헌병에 대하여 투석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일본헌병을 때려눕히는 등 기세를 올렸으며, 밀양 등지에서 출동한 일본군 응원부대와도 접전을 벌이면서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계속된 증원 출동으로 말미암아 몇차례 공방을 벌이던 시위대는 해산되고 말았으며, 이 때 오학성 등 중심인물 3백 64명이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1월 20일 대구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2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5집 1225면

만족도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를 평가해 주세요.

평가:
  • 담당자 : 주민생활지원과 복지기획담당 전화 : 055-359-5662